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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영 Jan 31. 2024

65. 내가 만난 100인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지만

모자장수.


8년 전, 새 언니와 둘째 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필리핀 보라카이 여행을 떠났다.

보라카이는 아기자기하고 물가가 아주 저렴한 섬 중에 하나였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길거리 미용실에서 레게 머리를 했다. 인증사진을 올리니 사람들이 내 머리를 보고 감자에 골을 내놓은 것 같다고 놀렸다.

그래도 좋았다. 나는 이곳에서 일주일간 삐뚤어지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다가 한국으로 가 다시 머리를 풀고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직장생활 하는 정상인으로 살면 그만이다.


보라카이는 관광지답게 현지인들은 우리를 단 번에 한국사람으로 알아보고 한국말도 아주 능통하게 구사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상품판매에 최선을 다했다.

"안녕하세요! 낙하산! 낙하산 타세요."

"안녕하세요. 요트. 요트 안 타요?"

"언니들 마사지받고 가요. 예뻐져요."


이 한마디를 시작해 끈질기게 따라와 호객행위를 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살짝 불편한 미소와 빠른 걸음으로  그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며칠 뒤 아침산책을 나갔다.

"예쁜 언니들. 오늘 햇빛이 따가워요. 모자 사 세요."

"우리 모자 있어요."

"언니가 가진 모자 말고도 다른 좋류의 모자가 많이 있어요. "

나는 그의 지게에 가득 실은 100여 가지의 모자보다 그의 언어실력에 조금 놀랐다.

그리고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우리가 여기에 오래 머물게 아니라서요. 이 모자 하나로 충분해요."

"언제 한국 가세요?"

"모레요."

솔직히 나는 그가 '모레'라는 단어를 못 알아들을 줄 알고 영어로 다시 말해주려고 했었다.

"모레요? 이틀 남았네요. "

"네."

"혹시 오늘이나 내일 놀다가 모자 잃어버리면 사러 오세요. 사람들이 바닷바람에 모자를 많이 잃어버려요."

"아~네 당연히 그래야죠."

"항상 이곳에 있나요?"

"저는 그냥 이 섬 끝에서 끝을 왔다 갔다 해요. 그래서 언제든 만날 수 있어요."

"그런데 진짜 한국말 잘하시네요."

"아닙니다. 아직 배우고 있습니다. 좋은 여행 되세요."


그가 떠나 후에도 나는 그를 쉽게 지우지 못 했다. 저 정도의 영어와 한국어 실력으로 필리핀이 아닌 한국에 살았더라면 모자장수보다 더 큰 일을 하고 있지않을까? 어쩌면 정장을 잘 차려입고 비정상회담 같은 곳에 캐스팅되어 방송인으로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촌구석에 박혀 뛰어난 어휘실력을 저렇게만 사용하고 있을까 순간 안타깝기도 했다. 오지라퍼인 나는 조금 더 앞서갔다. 그가 만약 미국이나 영국 같은 선진국 출신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그의 태생까지 건드려보았다.


하지만 올해 목표 중 하나가 '오지랖을 줄이자'인 것처럼 여기서 멈추었다. 어쩌면 삶의 워라밸은 그가 나보다 더 높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또 아무리 남의 나라에서 좋은 대접을 받아도 내 나라에서 그냥 그렇게 사는 게 최고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내가 만난 사람들 중 한국어를 가장 잘하는 외국인이었다.


짧지만 여러 번 생각나게 하는 자

그저 오지랖 넓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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