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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영 Apr 12. 2024

73. 내가 만난 100인

분명  당신에게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치킨집 사장님


5번이 헐레벌떡 들어와 매고 있던 가방을 바닥으로 내팽개치고는  전화수화기부터 들었다.


"여기 00번지인데요. 양념치킨 한 마리만 해주세요!"


그리고는 교복차림 그대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배 고파 죽을 것 같아! 치킨 먹고 씻어야지!"


5번은 엊그제 받은 한 달 용돈을 치킨 한 마리에 올인할 계획이었다.


"한 달 용돈을 벌써 다 써 버리면 앞으로 뭘 먹고살려고 그래?"

"몰라! 몰라! 치킨이 너무 먹고 싶은 걸 어떻게 해!"


컴퓨터 전원을 켜고, 부팅이 되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리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인내심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시절 어른들이 보기에는 그저 숨만 쉬고 학교만 다녔을 뿐인데 매달 꼬박꼬박 용돈을 받는 걸 보면 세상 참 쉽게 산다는 말이 이쯤 어디에선가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5번은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다리를 달달 떨며 기다리다 불현듯 뭔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누나! 누나도 치킨 먹을래? 나랑 같이 반띵 하는 게 어때?"


단순한 5번이 만든 협상테이블에 덥석 앉으면 손해이다. 시간을 좀 끌면서 무조건 한 번은 튕겨줘야 한다.

그런데 그전에 치킨이 와 버리면 내가 을이 되고 5번이 갑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치킨을 본 나는 엄청 먹고 싶을 테고 5번은 그때를 노리고 치킨을 개수대로 흥정한다.


"글쎄! 살짝 출출하긴 한데... 크게 당기는 건 아니고... 난 저녁으로 뭘 먹지?"

"그럼 3000원만 내. "

"3000원?"

"대신 3000원 치만 먹어야 해!"


하지만 치킨을 주문을 한 지 40분이 넘어도 오지 않는다. 그리고 5번도 배가 고파서인지 아니면 게임에 계속 져서 인지 신경이 날카로워져 가더니 갑자기 입고 있던 교복을 벗어던져놓기 시작했다. 하나, 둘 던져진 교복이 바닥에 나뒹굴고 마침 5번은 타잔차림이 되었다.


"아! 치킨 왜 안 와! 누나가 치킨집에 다시 전화 좀 해봐!"

"내가?"

"치킨 더 먹게 해 줄 테니까 빨리 전화 좀 해 봐!"


몇 번의 신호후 치킨집 사장님의 답변은 갑자기 주문이 밀려서 10분이 더 늦어질 거라고 했다.

5번은 10분 뒤 치킨이 오면 타잔차림의 자신이 나갈 수 없으니 나더러 계산하라며 지갑을 던졌다. 나는 그때부터 10분을 세기시작했다. 초저녁이라 TV도 재미가 없었고 공부는 더욱더 하기 싫었다. 배도 슬슬 고파왔고 밥솥과 냉장고 문만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10분이 되어도 치킨이 오지 않자 아날로그시계 분침이 집집마다 다를 수 있으니 1분을 꾹 참고 더 기다렸다. 오지 않았다. 5번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다시 치킨집에 전화를 걸었다.


"여기 00번지 인대요. 치킨 아직 멀었나요?"

"지금 출발합니다."


마치 급한 화장실 용변을 잘 참다가도 갑자기 화장실 문 앞에서 급해지는 원리처럼 나는 급속도로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치킨 3000원 치로 배가 찰 것 같지 않아 치킨양념에 비벼 먹기 위해 밥도 미리 퍼 놓았다. 고봉밥의 김은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꾹꾹 누르고 있었다. 그래도 치킨은  오지 않았다. 한숨을 쉬고 전화기를 들어 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만 속절없이 같은 간격으로 울렸다.


"띵동!"


허겁지겁 뛰어가 문을 열어 나는 투덜거리는 말투로 사장님께 말했다.


"왜 이제 오세요? 얼마나 기다렸는데..."

"죄송해요. 갑자기 주문이 많아져서요."


5번의 찍찍이 지갑에서 단 한 장뿐인 지폐를 꺼내 사장님 손에 놓았다.

그때 이마를 타고 주르르 내려오는 땀을 닦고 있던 사장님 손과 내 손의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지폐 한 장이 바닥으로 또르르 떨어졌다. 그때 얼른 내가 주워서 드려야 했다. 그리고 내 쪽에서 줍기에 더 가깝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뚱한 표정으로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사장님은 뻣뻣한 몸을 구부리며 떨어진 지폐를 줍고는 치킨을 건네주었다.

"맛있게 드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네."

건네받은 치킨 비닐손잡이가 땀에 젖어 축축했고 문을 닫을 때 사장님이 서 있던 바닥에도 굵직굵직한 땀방울이 흥건했다.


한끝의 무례함을 용서한 자.

한끝의 무례함을 용서하지 못한 자.

우린 둘 다 그날의 끝을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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