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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영 Apr 22. 2024

74. 내가 만난 100인

구린 영어

호주 배낭여행의 막바지였다. 한 달 넘게 캐언즈에서 멜버른까지 동부를 구석구석 돌았다. 그리고 다시 시드니로 돌아와 3-4일을 머문 뒤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정미는 배낭여행 중  만난 친구이다. 그녀는 울산출신으로 1년간 휴학을 하고,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번 돈으로 이곳으로 배낭여행을 왔다. 시드니에 도착한 우리는 백패커(주로 배낭족들이 머무는 도리토리형태의 저렴한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고 시내를 구경한 뒤 쇼핑을 즐겼다. 서너 시가 되면 언니친구가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초밥가게로 가 팔고 남은 초밥을 한가득 받아와 공원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덕분에 우리는 다시 돌아온 시드니에서의 가난한 배낭족 신세를 모면할 수 있었다. 여행 내내 나중을 대비해 하루 5달러로 생활을 해왔다. 아침에는 시리얼 또는 잼 바른 식빵을, 점심에는 1-2달러짜리 머핀이나 피자를 먹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쌀로 밥과 라면을 아껴 아껴 먹었다. 그러다 보니 출국을 앞둔 우리는 지금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배낭족이 되어있었다. 마지막 날 저녁메뉴는 무조건 스테이크였으며 별 3개짜리이지만 호텔에서 꼭 한번 자보기 로 했다.



백패커는 짐만 풀어놓고 머무는 곳이 아니라 한국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재료로 저녁을 해 먹고 서로서로 여행정보를 공유하거나, 여행 중 겪었던 각자의 해프닝을 풀어놓는 만남의 장소였다.


"블루마운틴 가 보셨어요?"

"블루마운틴?"

"이름이 예뻐서 가 보긴 했는데 저는 그렇게 인상적이진 않았던 것 같아요."

"선셋이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고대 유칼립투스가 잘 보존되어서인지 진짜 산이 파랗더라고요."


그때 묵묵히 듣고있던 정미가 방으로 돌아와 블루마운틴에 한번 가 보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그런데 혼자 갈 자신이 없으니 같이 가자고 했다. 사실 나는 남은 돈을 그곳에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그녀가 말했다.


"아까 그 사람 말대로 스트라스... 그 어딘가까지 가는 티켓만 끊고 가면 되잖아? 다들 표 검사를 잘 안 한다고 하잖아."

"그러다 걸리면 100불을 내야 해! "

"그 사람들도 다 그렇게 다녀왔다고 하잖아! 거기 다녀온 사람들 중  표 검사를 받았다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어!"

"하긴 지난번 내가 갔을 때도 표검사는 안 했어."

"그러니까 스트라스... 암튼 거기까지 가는 표를 끊어서 다녀오자."


블루마운틴까지 가는 기차비는 왕복 25달러 정도 했으며, 그 중간 환승역인 스트라스필드까지 표값은 5달러였다. 우리는 그 20달러를 아끼자고 그런 편법을 썼다. 솔직히 20달러면 4일 치 식비이기도 했고,  이틀 치 숙박비이기도 했다.


다음 날 우리는 어제저녁에 받은 초밥을 챙겨 들고 낭만의 블루마운틴으로 향했다.

"스프라스필드,  표 2장이요."


한달 동안 버스를 타고 실컷 봐온 호주풍경이었지만 기차는 익숙한 듯 낯선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각 역사마다 정차할 때면 심장이 콩닥콩닥 거렸다.


'만약 여기서 걸리면 내 남은 100불은 나라망신과 함께 허공에 날리는 것이다.'


환승역인 스트라스필드역은 정차시간이 조금 더 길었다. 마치 내 심장 뛰는 속도에  맞추어 기차가 서서히 출발하는 것 같았다.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처럼 역사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안심하고 우리는 다음역 그리고 그다음역까지 무사히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경찰이 나타났다. 역무원이 아닌 경찰관 둘이서 표 검사를 하는 것이었다. 하긴 바로 벌금을 물리려면 역무원보다는 경찰관이 이 일을 하는 게 오히려 더 마땅했다.

우리 자리로 온 경찰이 어린 동양인들에게 활짝 웃으며 인사를 했지만  불법을 저지른 우리는 미안함에 수줍게 인사를 했다.

"티켓?"

"티켓!"


우리의 티켓을 확인한 경찰은 서로 날카로운 눈빛을 교환했고 정미와 나 또한 눈을 교환했다.

'우리는 딱 걸렸어!'


그때였다. 티켓을 들고 있던 경찰이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 어디로 가는거야?"

"스트. 롱.. 필드.."


정미는 발음은 정말 스트롱했다. 그 어느 누구도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든 영어였다. 정미로써는 표에 스트라스필드로 쓰여 있으니 그대로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대답한 듯했다. 하지만 그 전날밤부터 그 지명은 왜 이렇게 입에 딱딱 붙지 않는지 미칠 노릇이었다.

"스트로? 뭐?"

"스트로 옹~스 필-드?"


정미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 보다 구린 영어발음이 더 부끄러웠는지 말끝을 흐렸다.

"스트라스삘드."

보다 못한 내가 힘껏 발음을 굴려 말했다. 그땐 F발음과 P발음의 엄청난 차이를 미처 몰랐다. 경찰관 역시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꺄우뚱거렸다. 나 또한 정미처럼 위축이 되었지만 한번 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발음을 굴렸다.

"스트라스필드"


그때였다.

"스트라~뜨~피-ㄹ-드(Strathfield)"

우리는 자동차 안 흔들 인형처럼 고개를 마구마구 끄덕였다. 그러나 곧바로 그들의 미관이 찌푸려졌다.

"음~~~ 너희들 길을 잃었어! 너희 목적지인 스트라뜨피-ㄹ-드는 벌써 지났어!"


우리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어느 나라에서 왔니? 일본? 한국?"

"한국이요!"

"그래! 그러니까 코리언 걸스! 너희들 다음다음역에서 갈아타야 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

"예스"

"우리가 다음역에서 내릴 거야. 그러니까 너희는 우리가 내린 다음역에 내려서 갈아타야 해!"

"예스!"


그는 우리 티켓에 검수도장 구멍을 만들어 주고는 다음역에서 내렸다.

우리는 기차 창문에 다슬기처럼 붙어서 그가 내리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고 그는 우릴 향해 손까지 흔들어주는 친절함을 보였다.


"Bye!!"

"Bye!!"


구린자.

구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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