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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영 Nov 11. 2024

90. 내가 만난 100

청년, 청춘을 건너뛰다.

여기, 오늘도 아버지의 실종신고로 긴 하루를 이어가는 청년이 있다.


몇 달 전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가 퇴원 후 잠시 바람을 쏘인다며 산책을 나간 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전화도 받지 않고 온 동네를 다 뒤져도 아버지는 온데간데없다. 지금 시대에는 전화기에 위치추적기능이라고 있지만 청년의 20대 때에는 그런 게 존재하지 않았다. 현대과학 문명보다 몸으로 부딪히는 게 더 정확하고 빠른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나마 조금 나아진 건 아버지를 찾는 요령과 신고 후 잠시 기다리는 익숙함이다.


아버지가 쓰러지신 그때 청년은 22살이었다. 청년은 곧장 학교를 그만두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23년간 아버지와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4남매였던 청년의 가족들이 온통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청년의 누나는 교직생활을 하며 집안의 생활비를 댔다. 멀리 사는 형과 둘째 누나도 매달 생활비를 보내왔으며 큰돈이 들어갈 때도  돈을 척척 구해왔다.


처음에 아버지가 왼쪽에만 마비가 왔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대화도 하시고 명철함도 가지고 계셨다. 아버지의 두 번째 뇌출혈이 왔을 때는 나머지 절반마저 잃으셨다. 환자를 돌보는데 미숙한 청년과 어머니가 잠깐 한눈팔 때마다 아버지는 집 밖을  나가셨고 그 길로 계속 직진만 하셨다. 그리고는 몇 시간 뒤에 집으로부터 몇십 킬로 떨어진 곳에서 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한밤중이 다 되었는데도 깜깜무소식이었다. 뜬 눈으로 밤을  꼴딱 새운 새벽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다행히 아버지를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안도하는 마음에 경찰서로 뛰어간 가족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오열했다. 밤새 산을 넘어가신 아버지가 어두운 산길에서 헤매면서 여기저기 긁히고 멍들고 온몸이 성한 곳이라곤 없었다. 산을 넘에 새벽에 어느 민가에 다다른 아버지가 대뜸 배가 고프다며 밥을 좀 달라고 했다. 아버지의 행색을 수상히 여긴 민가주인이 밥을 차려주고는 경찰에 신고를  했던 것이다.

또 한 번은 아버지와 어머님이 나란히 앉아 가래떡을 가위로 잘라 꿀에 찍어 먹고 있었다. 가래떡은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기도 했다. 그때 갑자기  어머니에게 급한 전화가 오면서 잠시 자리를 비운 찰나 아버지가  긴 가래떡을 집어삼키는 바람에 기도가 막혀 돌아가실 뻔했다. 그렇게 한 순간, 순간들을 넘기며 지나오다 보니 어느새 25년이 흘렀고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청춘을 건너뛰고 중년으로 넘어가 버렸다.


재작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청년은 이제 자신을 돌보기 위해 운동도 시작하고 공부도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중년이 되어버린 청년에게 어딜 가나 쏟아지는 질문은 단 하나였다.


"왜 여태 결혼을 안 했어요?"


이제 마흔 중반이 된 청년은 이 질문과 함께 어딜 가나 어린아이 취급을 받고 있다.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고,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고,

나이만 먹는다고 해서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라고, '


세상은 그렇게 청년에게 쉴 새 없이 활을 쏘고 있었다. 그래도 청년은 끄떡없다. 어느 누구보다도 더 단단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중년인 우리가 언제가 한 번쯤은 겪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을 청년은  20대에 맞딱들였다. 당장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온 가족이 자신에게 모두 쏟아부어도 부족할 청년시절을 뒤로한 채 자신을 희생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세상이 청년의 삶에 가산점을 쳐주는 것도 아닌데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청춘과 맞바꾸었다.



청년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해 함께 했던 가족 여행을 회상했다.

포기할 줄 모르는 청년은 부산에 있는 어는 한 회사에서 환자용 자동차를 렌트해 왔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하기엔 엄청난 준비가 필요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아버지와 함께한 첫 여행은 성공적이었다. 아버지 함께 온천욕도 즐기고 바다를 보며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도 먹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호텔에서 뽀송뽀송한 이불을 아버지께 덮어드릴 때마다 아버지가 참 좋아하셨다. 그때 형의 화끈한 씀씀이로 가격이 제법 나가는 호텔 조식을 즐겼는데 그렇게 정갈하고 깔끔한 음식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형이 말했다.

"내년에도 또 오자!"


그때 그 말이 너무 따스해서 눈물이 날뻔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도 두 번째 여행을 계획했고,  여행준비 또한 처음보다 훨씬 수월했다. 두 번째 여행 때  청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아버지보다 어머니였다. 그땐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좋아하셨던 것 같다. 청년이 잠시 놓치고 있던 건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음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 , 청년은 어머니와 친구처럼 아옹다옹 잘 살아가고 있다.


"엄마, 누나! 오늘은 미나리 삼겹살 한번 구울까?"

"나 자꾸 살쪄서 안 된다."

"낮에 먹으면 되지."

"그러면 묵은지 한 포기 꺼내 놓을 게."


나와 동갑내기인 청년의 삶은 잠시 내 삶에 경종을 울렸고,  감히 나는 그의 중년을 응원해 본다.

다시 청년으로 역행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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