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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영 Mar 16. 2023

내가 만난 100인

14. 더 글로리의 강자

그대를 용서한 것도 그렇다고 용서를 안 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이쯤 어딘가  애매한 위치에  그냥 서 있는 것뿐입니다.

시간이 흘러 나도 그저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 어느 날 순간 내 거울을 통해 그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 역시 약자인 누군가에게 내 감정을 스스럼없이 표출한 적이 있었고, 한순간의 겁쟁이가 되어 방관자가 된 적도 있었으며 , 때론 가장 뾰족한 말로 누군가를 아프게 한 적도, 또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미워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대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냥 여기에 그대로 서 있는 것뿐입니다.


작은 시골 초등학교에서 같은 학교, 같은 반으로 4년을 지내오다 보니 어느 순간 자연스레 강자, 약자, 방관자들의 무리로 나눠져 있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우리는 운동장에서 흔들리는 단 2개뿐인 그네를 쟁취하기 위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출발한 A를 가까스로 따라잡았으나 간발의 차이였다. A는 그넷줄 2개를 동시에 낚아채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이 그네 하나는 내거고 하나는 K 줄 거야. 넌 저쪽에서 줄이나 서."

뒤를 돌아보는 K는 강자답게 유유히 걸어오며 당연한 듯 A로부터 그네를 건네받았다.

"고마워."

그리고 한참을 타더니 마침 나에게 그네를 넘겨주었다.

"자! 이제 너 타!"

"고마워!"

내가 그네를 받자마자 세게 굴려 하늘 높이 솟아오르자 수업시작종이 울려버렸다. K는 곧바로 하늘로 올라갈 내 그네를 미리 예상이나 한 듯 자신의 무리들과 키키덕거리며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 K의 권력은 지난 4년을 거쳐오면서 점점 세졌고 , A와 나를 포함한 여학생들은 약자로써 그녀에게 굴림하며 지내왔다. 남학생들은 모두 방관자가 되기도 하고 때론 은근히 K의 편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보내고 다음학기가 시작되면서 가을운동회 준비로 학교전체가 들떠있었다.

운동회의 꽃인 학년별 계주 달리기는 학년 당 단 두 명만 선출되어 청백으로 나눠졌다. 나는 청팀대표였고 하필 K가 백팀대표로 뽑혔다. 당시 나는 4학년이었지만 학교에서 가장 빠른 육상선수였기에 쉬는 시간이 되자 5, 6학년 선배들이 몰려와 다짜고짜 물었다.

"이기영! 너 어느 팀이야? "

"청팀"

"야~~!! 계주는 청팀이 이겼다. 이기영이 청팀 이래."


그때부터였다. K가 갑자기 나에게 친절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무줄놀이를 할 때도, 급식을 먹을 때도 내 옆에 딱 붙어서 이것, 저것 챙겨주었다. 그리고 얼마못가 그녀의 속셈을 드러냈다.


"계주에서 나를 추월하지 말아 줘! 제발, 알았지? 그리고 혹시 너희 팀이 앞서가도 좀 천천히 달려. 선배들한테는 몸이 아프다고 말해. 알았지?"

"그래, 알았어!"

나에게 그렇게 어려운 부탁이 아니었기에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뜻밖의 나의 수락에 K는 감동한 듯 나를 끌어안으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운동회 예행연습날이었다.

처음부터 우리 팀이 지고 있었다. 상대팀과의 간격도 제법 벌어져있었다. 그리고 우리 차례가 되자 K가 출발선에서 바통을 얼른 받아 내달렸고 나는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그리고 5학년에게 바통을 넘겨주고는 자리로 왔더니 K를 제외한 모두가 울상이었다.

"처음부터 간격 너무 많이 벌어졌어. 저 정도는 내가 따라잡을 수가 없어."

나는 아주 뻔뻔하게 말했고 그런 나를 K는 어깨동무까지 해 가며 감싸주었다.

그날 예행연습이었지만 제일 많은 점수가 걸린 계주에서 지면서 청팀의 패배로 끝이 났다.


운동회날이 되었다.

마스게임과 악대퍼레이드를 K와 아주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하였고 이제 계주만 남겨놓은 상태였다.

출발선에서 화약 총소리가 울리면서 계주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우리 팀이 지고는 있었지만 그때만큼 간격이 크게 벌어져 있지는 않았다. 나와 나란히 출발선 앞에 서게 된 K는 웃음의 윙크를 날리더니 바통을 넘겨받아 내달리기 시작했고, 나 또한 그 뒤를 따라갔다. 문제는 코너를 돌아 직선코스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오셨다.  평일이라 회사에 계신 줄 알았던 아버지가 그곳에서 내 이름을 크게 부르고 있었다.


"기영아! 뛰어!"


'에라이~ 모르겠다.'

나는 순간 아버지에게 멋진 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K와의 약속을 완전히 저버린 채 그녀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함성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더 빨리 앞으로 쭉쭉 달려 나갔다. 

아마  육상대회 때 보다 기록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다음 주자인 5학년은 출발선에서 저만치 앞으로 나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바통을 넘기고 보니  상대팀과의  간격이 제법  벌어져있었다. 그 간격이 그대로 유지되면 우리 팀 마지막 주자가 결승선을 먼저 통과했다.

그날 K는 백팀의 역적이 되었고, 나는 K의 역적이 되었다.


그때 이후 K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반 여학생들에게 나와 절대 놀지 못하게 했다. 말 그대로 나는 4학년 여학생 왕따가 되어버렸다.

사실 처음 왕따가 된 나는 모든게 아주 편했다. 더 이상 K에게 굴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예쁘지도 않은 그녀에게 예쁘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네를 맡아주지 않아도 되었으며, 또 모든 걸 그녀에게 먼저 양보해 줄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잘 지내고 있었지만 K는 그런 나를 아주 못 마땅히 여겼다.


강자

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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