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회 이후 왕따가 된 나는 학교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가끔 마음 한 켠에서는 더 이상 K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어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우리는 또 같은 학교, 같은 반으로 5학년을 맞이했다. K와 나는 변한 건 하나도 없었다. 우린 그저 강자와 왕따일 뿐이었다.
신학기 모둠활동시간이었다. 선생님은 각모둠별로 한 명씩 조사한 내용을 발표하는 과제를 주셨다. 모두가 모둠의 첫번째 발표자가 되는 걸 꺼려했다. 도서관도 없는 작은 시골에서 자습서 없이 혼자 과제를 해낸다는것은 불가능했다 .또,학기 초였기에 모두가 자습서를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K의 권력은 어김없이 이곳에서 발휘되었다. 단연 가장 첫 번째 발표자로 나를 지목했고, 모둠원들의 만장일치 또한 당연한 결과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모둠발표를 어찌할지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우연히 지나가는 6학년 선배에게 혹시 작년 자습서가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벌써 다른 아이에게 줘버렸다고 했다. 자습서를 사려면 읍내로 가야만 했기에 주말이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내일의 숙제가 마치 밀린 방학숙제처럼 느껴졌다. 바로 그때였다.
"어제 우리 누나 자습서 샀는데... 아빠가 시내에서 사 왔어."
H의 남동생이 집으로 가는 길에 한마디 툭 던졌다.
친구인 H는 아주 여리고 착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녀 또한 K의 압박에 의해 더 이상 나와는 놀지 않게 되었다. 예전처럼 나와 어울렸다가는 같이 왕따가 되거나 지금의 내자리가 H로 대체 될 수도 있기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한참을 망설인후 나는 용기를 내어 H에게 전화를 했다.
"나 기영이인데..."
"어~~ 그래 왜?"
"너 자습서 있지?"
"...."
"자습서 한 번만 보여줄 수 있어? 내일 발표할 내용만 볼게."
"어.... 그래, 우리집으로 와."
다행히 H는 잠시 주춤하는 듯 했으나 거절하지 않았다.
3월이지만 오후 5시가 넘은 시골의 분위기는 조금 음산했다. 10분을 넘게 자전거를 타고 달려 H의 집에 도착했다. H의 집에는 방금 막 밭일을 끝내고 오신 그녀의 아버지가 대청마루 끝에 걸터앉아 장화를 벗고 계셨다.
"이 시각에 네가 웬일이니?"
"H와 같이 숙제를 하기로 했어요."
"그래? 같이 숙제도 하고 저녁도 먹고 가."
"네?"
"그래. 우리 국수 삶고있으니까 같이 먹고 가."
부엌에서 국수봉지를 한 움큼 쥐고 있던 H 엄마가 문밖으로 고개를 삐쭉 내밀며 말씀하셨다. 그리고 H가 방문을 열고 나와서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쪽으로 와."
그녀는 나를 자신의 방으로 안내하고는 방바닥에 새 참고서를 펴 내쪽으로 돌려주었다.
"이게 새 참고서야. 네가 발표할 내용은 여기에 있어."
"고마워."
"다음 발표자는 나야. 그런데 내 과제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이거는 이 글 읽고 그냥 주제만 찾으면 되는 거야."
"그래? 쉬운 거네?"
"응!"
우리는 그렇게 학교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그리고 예전의 우리처럼 숙제를 함께 했다. 그런데 그때 바깥에서는 H의 어머니가 저녁먹으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얼른 짐을 챙겨 신발을 신고 어른들께 인사를 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 왜 국수를 먹고 가라니까."
"늦어서요. 안녕히 계세요."
"국수 안 좋아해? 많이 삶았어. H야 얼른 친구 데리고 와!"
나는 줄행랑을 치다시피 그 집을 빠져나왔고, H는 내 뒤를 따라 나왔다.
"국수 먹고 가지 그래."
"괜찮아! 오늘 고마웠어."
나는 급히 자전거의 페달을 밞으려는데 뒤에서 H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저기?"
"응?"
"내일 학교 가서는 오늘 네가 여기 온 건 비밀이다."
"알았어."
"꼭이야~!"
사실 나는 H의 집에서 국수를 먹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이 집에 오래 머물수록 H를 더 불안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녀의 불안한 눈빛은 그 집에서 부터 다음날 학교에서까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일부러 H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K에게 보란 듯 당당하게 발표를 했다. 그런데 발표를 마친 뒤 이것, 저것 보충설명을 하던 선생님이 물었다.
"그런데 자습서를 벌써 샀니?"
순간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H의 떨리는 손이었다.
"아뇨, 동네 6학년 선배에게 받았어요."
큰 용기를 낸 자.
더 큰 용기를 얻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