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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Nov 14. 2020

16. 하마르티아

왜 과녁은 매번 빗나가는지

나는 좋아할 거요. 감히 좋아할 거요. 그 말을 지킬 것이오.
행복으로 가는 장애물을, 선함, 그래, 선으로 가는 장애물을 부술 것이오.
예전의 나보다,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소.


로체스터는 제인에게 열정에 취해 방탕했던 젊은 시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때 프랑스 오페라 무용수에게 빠져 어떻게 돈과 시간을 낭비했는지, 그녀의 배신에 얼마나 수치심과 증오를 느꼈는지, 자기 아이가 아닌 걸 뻔히 알면서 왜 그녀의 딸 아델을 이곳 손필드 저택으로 데려왔는지. 그 날 이후 로체스터 씨는 더 이상 쌀쌀맞고 거만하지 않다. 제인 또한 그와 나누는 저녁 담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게 된다. 그러던 어느 새벽. 제인은 나지막이 억누르는 듯 기괴한 웃음소리에 잠을 깨고... 발소리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가 보니 로체스터의 방 침대 주위가 불꽃으로 일렁이고 연기로 가득하다. 도대체 이 집엔 무슨 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걸까.   




하마르티아.

'과녁을 빗나가다'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의 주인공이 파멸에 이르게 되는 이유를 '하마르티아(결점)' 때문이라고 언급하면서 유명해진 단어다. 결점이라 하면 선천적이거나 도덕적인 결함에서부터 사소한 판단착오까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지니는 결함의 크기가 그 때문에 겪게 되는 고통과 불행의 크기에 비해 지나치다"는 것. 비극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소한 하마르티아 때문에 운명처럼 비극으로 걸어들어 가게 되는데... 그의 결점이 악의가 없고 사소하다는 점에서 그의 불행더 비극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제아무리 자신의 운명(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다는 신탁)을 피하려 한들, 그의 결(자신의 왕국 '테베'에 전염병이 도는 이유를 꼭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은 결국 그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라니. 오이디푸스에게 근친상간의 운명을 지어놓고 그가 그의 운명을 따랐다고 저주를 내리는 신의 역설 앞에서 우리는 오이디푸스에게 동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 단어는 신학적 용어가 되면 좀 더 인간의 책임에 무게가 실린다. 신학에서의 ‘하마르티아’ 역시 과녁을 빗나가는 화살인데, 신의 창조 목적을 빗나가며 매번 어긋난 ‘선택’을 하는 인간의 화살이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며 인간의 '인간됨'을 위해 자유의지를 부여했고, 인간이 선한 선택을 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원한다. 하지만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판단하는 자가 된다.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올라선 것. 신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자기 욕망에 눈멀며 인간의 화살은 계속 과녁을 빗나간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인'과 '죄된 세상'은 이렇게 신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난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잉태된 개념이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우리 모두에게.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도, 매번 남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자신이 좋은 사람이길 원한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 만큼은 머리 위에 빛나는 별만큼 우리 인류의 마음 속에서 오래 전부터 반짝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낼모레 오십을 앞둔 내 앞에 펼쳐진 현실은 내게 매일 증명한다. 인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나빠지는 것만 같다고.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 뜻하지 않은 오해를 낳는다.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 이상처럼 살아지지 않고 현실과 타협하며 살게 된다. 문제가 뭔지 뻔히 알아도 잘 돌이켜지지 않는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회피하고 외면한다. 왜 인간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만 잘되지 않을까. 선을 원하나 악을 행할까.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말한다. 인간의 악은 어찌나 시시하고 평범한지, 우리 주변에 동전의 양면처럼 널려 있다고.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 전범 문제를 국제적으로 막 논의하던 시절. 독일 나치스 친위대 중령이었던  '아이히만'이 극적으로 잡혀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워진다. 그녀는 <뉴요커>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파견됐다. 아이히만을 만나기 전까진 그녀 또한 우리처럼 막연하게 거대한 악의 실체 같은 것을 상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그녀가 발견한 악의 실체는  '없음'이었다. '무사유' 즉, '생각 없음'이 그의 '악'이었다.


수백 만의 무고한 인간을 가스실로 싣고 가면서도 아이히만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양심에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았다. 그는 되려 자신이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면 더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지독한 증오나 혐오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습관처럼 회사에 출근해 상관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랐던, 자신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 열심히 살던,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 그의 죄목이라면, 수많은 이들의 죽음 앞에 인간이라면 당연히 품어야 할 - 인간의 존엄이랄지 선과 악을 판단하는 도덕률 같은 - 가치를 품고 살지 않았다는 것. 그 아무 생각 없음이 그를 희대의 살인마로 만들었다.  


한나 아렌트가 발견한 '없음'의 개념은 신학적 고찰과도 맥을 같이 한다. 신학에서 악은 선의 '부재'다. 악은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없음'으로만 존재한다. 선의 부재가 악이고, 빛의 부재가 어두움이다. 땅히 있어야 자리에 선이 들어서지 않으면 악이 되고, 빛이 들지 않으면 어둠이 된다. 


한가지 더 특이한 점은,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죄목으로 '무사유'를 내세울 때 무사유 앞에 '순전한(sheer)'이란 단어를 붙였다는 것이다. 순전한 무사유. 악순수성이라니? 순수한 사람일수록, 그러니까 인간이라면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은 사람,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일수록 더 악의 유혹에 빠져들기도 쉽다는 이 아닌가.


주변에 보면 왜 그런 사람이 있지 않나. 별 어려움이나 시련 없이 자라 세계관 자체가 순진한 사람. 정말 착한 사람인데, 뭔가 모호한 판단이나 행동을 해서 주변 사람들을 혼란하게 한다. 딱히 무엇이 잘못이라 하기도 애매하니, 지적할 수도 없다. 실체가 없으니 미워할 수도 없다. 그들의 특징은 상투어를 즐겨 쓴다는 건데,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면 나쁜 말은 하나도 없다. 다 옳고 좋은 말이다. 근데 뭔가 잘 설득되지 않는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하지만 자기 생각 같지 않은. 그렇다고 나를 위한 언어도 아닌. 그래서 잘 안들린다. 


나는 그들이 일종의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때 나치와 그들을 추종했던 독일인들처럼. 다른 사람의 생각과 집단과 전체의 사고에 함몰했던 그들처럼. 그건 순진한 게 아니다. 미성숙한 것이다. 자기 생각과 언어를 가져야 할 어른들이 주체적 책임을 져버리고, 전체에게 자신의 결정을 얹어서 실려간 것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제2의 나치스 독일인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게 한나 아렌트와 나치스 독일이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악은 그저 선을 행하지 못하는 자들의 행위다.'   

선을 행하는 것의 능동성과 악이 되는 것의 수동성.  소설가 김연수의 악에 대해 정의 앞에 나는 생각한다. 나의 과녁은 무엇이고, 나의 화살은 어디쯤 비껴 있는가. 나는 지금 얼마나 능동적으로 활시위를 당기며 살고 있는가.


그리고 다짐한다. 생각하는 이 자리만큼은 아무에게도 내어주지 않겠다고. 빛을 향해 나아가겠다고. 적어도 어둠에 굴복되진 않겠다고.


* <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저/손명현 역, 고려대학교 출판부.

* 하마르티아 : 네이버 지식백과, 문학비평용어사전 참고.

: <주 3> 이 결점이 지적인 것인지, 성격적 도덕적인 것인지는 학자들 간의 논제가 된 문제이나, 양자를 다 포함한 것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주인공은 그의 결점 때문에 불행을 초래하므로 그의 불행은 단순한 우연한 일은 아니나, 그러나 그것을 오로지 그의 책임으로 돌리고 당연한 불행이라고 하기에는 그 결점은 너무도 인간적인 결점, 악의 없는 결점인 점에서 보는 이로 하여근 애련의 정을 일으키게 한다. 81p

* <소설가의 일>, 김연수 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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