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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Nov 14. 2020

17. 자신의 초상

당신의 바닥은 무엇인가요  


앞으로 혹시나 로체스터 씨가 너를 좋게 여긴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 그림 두 장을 꺼내어 서로 비교해 봐.


경황없던 비밀스러운 밤과 로체스터 씨의 격정에 찬 고백을 들은 다음 날. 제인은 로체스터에 대한 조바심과 들뜬 열망으로 혼란스럽다. 하지만 곧 그가 사교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일찍 리즈 저택으로 떠났고, 그곳엔 아름다운 잉그럼 가의 세 아가씨가 살고 있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제인은 조용히 화구 상자를 꺼내 들어 캔버스 위에 두 얼굴을 그린다. '재색을 겸비한 상류 사회 숙녀, 블랑슈'와 '핏줄 하나 없고 가난하고 못생긴 어느 가정교사의 초상'을.  그제야 그녀는 조금 마음이 진정되고 예전의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직장인 초년생 때 쉬는 시간에 같이 차를 마시러 나가는 동료가 있었다. 그녀는 희고 여리여리한 외모에 간호대 출신이었는데, 어떤 계기로 인해 인터넷 서점에 입사하여 자신만의 경력을 쌓는 중이었다. 깔끔하고 자부심 강한, 남자들에게 쉽게 곁을 줄 것 같지 않은 도도한 이미지의 여자였다. 오후 네 시쯤이 되면 우리는 커피를 한 잔 사서 회사 뒤편에 조성된 작은 공원을 걷곤 했는데, 그러다 보니 서로의 연애 경력이랄지 남자 친구에 대해 꽤 내밀한 이야기까지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날의 화제는 당시 우리가 함께 속한 모임의 멤버였던 의대생. 꽤 날카로운 외모를 소유한 그는 바쁜 와중에도 모임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가 가진 의사라는 후광. 여자라면 한 번쯤 혹 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동료는 그 남자에게 조금 마음을 두기 시작한 상태였다.


"있잖아, 은주 씨. 나는 그동안 연애를 안 해본 건 아닌데, 생각해 보면 만난 남자마다 좀 별로였던 거 같아. 내가 좀 아깝단 생각하며 만났어. 그러며 생각했지. 내가 참 남자 복이 없구나, 하고."


지금이야 나이도 먹고 강약도 조절하여 말할 줄 알게 됐지만, 나는 그때도 좀 팩폭을 날리는 스타일이었던가 보다. 한창 자신의 과거 연애사에 빠져있던 그녀에게 대뜸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OO씨도 그땐 똑같이 별로였던 건 아니고?"  


그 말이 그때 그녀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을까? 큰 오해는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나 스스로도 그녀를 평가하거나 깎아내리려 한 말이 아니었기에. 그렇지 않은가? 신분 차이가 우리를 구속하는 조선시대도 아니고, 외기러기 짝사랑도 아닌 이 자유연애의 시대에! 남녀의 연애사에 있어 한쪽이 그렇게 훌쩍 기울 일이 뭐 그리 있을까. 비슷비슷한 사람끼리 만난다고 하지 않나.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그만큼 더 어리고, 철없고 연애에 대한 안목도, 기술도 없었을 것 아닌가. 그러니 그때 그 남자를 선택한 나도 딱 그 수준의 여자였겠거니 생각하는 게 나로서는 너무나 당연했던 거다.  


과거의 자신에 대해 회상할 때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실제보다 미화시켜 말하는 사람과 비하해서 말하는 사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후자에 가까운데, 지나친 비하는 겸손도 뭣도 아니며 결벽이나 강박에 가까운 것이란 걸 깨닫게 된 지금도 그런 습관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건 남의 입을 통해 나 자신이 평가절하 되기 전에 나 스스로 먼저 퇴짜를 놓는 다소 변태스러운 방식인데. 흠. 자신감, 자부심, 자존감 따위는 타고나길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나의 가문과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또한 나를 그런 단어들로 키워 주지 않았다.


러던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다. 최근에 나이 들어 만나는 자존감 높은 사람은 뭐랄까, 쉽게 상처 입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늘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차 있다. 내가 옳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의 의견은 틀리다. 틀린 의견은 수용하거나 이해하기 어렵다. 자기만의 성을 쌓는다. 외부와 교류하지 않는 성은 안전하다. 상처 받을 일도 없지만, 더 좋은 성으로 발전할 여지도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간 사회에서 홀로 독야청청하는 그런 성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성의 문은 어떤 방식으로든 열리기 마련이고, 안으로 닫힌 문은 일단 열리기 시작하면 외부의 침입에 쉽게 무너진다. 다른 의견을 제시받거나 자신에 대해 다소 부정적으로 언급하면 방어부터 하는 성의 얼굴. 그게 자존감 높은 이들이 나이 들며 마주해야 하는 자신의 상처 받은 얼굴이다.  

  

가끔 남편에 대해 생각할 때 저 사람이 좀 더 못난 사람이었어도 좋았겠다 싶다. 그가 자라며 부모의 기대를 좀 저버리고 실망도 시켜드렸다면. 어머니의 잔소리를 좀 듣고 자랐다면. 곁길로 좀 새봤다면…  그랬다면 적어도 “난 공부 안 해본 적이 없어서, 학생이 공부 안 하는 것 자체가 도저히 이해가 안가”라고 사춘기 아들과 이렇게 벽을 치진 않았을 텐데. 아내의 잔소리와 걱정이 다 쓸데없는 감정의 부산물이라고 치부하진 않았을 텐데. 이 지구 상엔 나와 다른 성별을 가지고, 나와 다른 성향을 가지고, 나보다 어떤 부분 부족하지만 동시에 나보다 뛰어난 장점을 가진 이들이 하늘의 별만큼 많다는 것. 그러기에 우린 좀 더 서로의 실수와 다름에 열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 수 있었을 텐데.


자존감 강한 사람들을 보며 나는 요즘, 자존감 낮은 내가 구축한 세상이 나름 괜찮은 세상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적어로 그 문은 외부로 열린 문이기에. 다른 것이 많이 섞여 들어와 내가 되고, 불완전하지만 다양함을 수용하는 성이 되었다. 늘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어서, 웬만한 일로는 놀래지 않는다. 이미 바닥이라서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다.


그래, 내가 가진 가장 초라한 그것이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그 바닥에서부터 나는 다시 올라서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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