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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Nov 18. 2020

18. 특권

아는 만큼 편협하고 가진 만큼 기득 한

사랑스러움은 여인들만의 특권이며, 합당한 특징이자 타고난 권리가 아닌가요?
못생긴 '여자'는 창조라는 아름다운 얼굴에 생긴 오점이에요.
두 주쯤 후에 로체스터는 화려한 손님들을 이끌고 손필드 저택으로 돌아온다. 홀은 오랜만에 즐겁게 떠드는 소리로 북적거리고 아델도 덩달아 흥분한다. 제인은 숨어 지내고 싶었지만 로체스터의 부름으로 홀에 앉아 손님들을 구경한다. 아름답지만 거만하고 독단적인 잉그럼 부인. 그녀를 꼭 빼어닮은 블랑슈 양은 남자들의 숭배와 찬사에 익숙한 듯 보였다. 과거 자신의 집을 거쳐간 가정교사들을 한껏 비웃더니, 새하얀 옷을 여왕처럼 차려입은 채 피아노 앞에 앉아 자신의 미모와 재능을 맘껏 뽐내기 시작했다. 제인은 블랑슈 양의 명령에 따라 노래를 부르던 로체스터의 아름답고 힘찬 저음을 뒤로하고 조용히 홀을 빠져나온다.    




독서모임의 한 멤버가 명절 때 시댁에 가서 들은 이야기다. 오랜만에 만난 형님이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물어오시길래 "저 요즘  도서관에서 만난 엄마들이랑 독서모임 해요"라고 했더니 형님 왈, 

"동서는 맨날 돈 안 되는 것만 하더라."


허물없는 사이니 그런 속엣말도 주저 없이 나왔을 테지만, 나는 일상에서 이렇게 훅, 들어오는 말들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생각한다.


그 '돈 안 되는' 책 읽기 모임에서 몇 년간 책을 읽으며 내린 결론이 있다. 구성원 자체가 아이를 둔 엄마들이다 보니, 어떤 책이든 이야기 나누다 보면 이야기의 절반은 양육과 교육의 문제로 귀결이 되기 마련. 정치, 교육, 사회  전반에 걸친 적폐들을 놓고 왜 '우리나라는? 왜 이 사회는?'이라고 한탄할 때, 우리에게 더 좋은 선택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들이 늘 도달하는 결론이 '돈'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를 학원으로 밀어 넣는 이유는 좋은 대학교에 보내기 위해서고, 좋은 대학에 가는 이유는 좋은 직장에 가서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다. 남편 무시하는 여자들 얘길 들어보면 남편이 옆집 남편만큼 돈을 못 벌어다 주기 때문이고, 살림하는 여자를 그저 노는 여자 취급하는 것도 다 이웃 여자처럼 맞벌이를 안 하기 때문이다. 교사들의 자질이 떨어지는 이유? 학교를 직업적 윤리보다 밥벌이 수단으로 다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점처럼 박힌 부정적인 몇몇이 오늘날 세태를 대변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문체가 아직 낯선 이들에게 입문서 정도로 권하는 책이 있다. 마이클 커닝햄의 <세월 The hours>.  <디 아워스>라는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주인공은 버지니아 울프, 로라 브라운, 클러리셔 본 - 이렇게 세 사람. 이들은 1923년 런던 교외, 1949년 로스앤젤레스, 20세기 말 뉴욕이라는 다른 시간과 장소에 살고 있지만, 모두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속 주인공인 '댈러웨이 부인'을 키워드로 얽혀 있다. 그리고 제각각의 시공간에서 손님맞이로 분주한 어느 하루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음은 버지니아 울프가 언니 바네사의 오후 방문을 앞두고 하녀 '넬리'와 벌이는 신경전.


이 날도 버지니아는 아침부터 소설에 대한 구상으로 여념이 없다. 주인공 '댈러웨이 부인'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을 담아낼 매우 절박하면서도 사소한 비극적 설정이 필요한데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넬리는 집안일에는 전혀 무관심한 여주인 대신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하다. 마침 버지니아가 아침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버지니아에게 '통보'하듯 오늘 메뉴에 대한 '허락'을 구한다. 양고기 파이와 야채수프를 준비했으며, '만약 부인께서 좀 더 멋진 다른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푸딩용으로 노란 배를 준비하겠다고. 그러나 넬리의 그 말투가 '도전장'처럼 귀에 거슬린 버지니아. 일부러 메뉴에 딴지를 걸고는, 멀리 런던까지 가서 '중국차와 설탕 묻힌 생강'을 사 오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넬리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어. 당연히 알고 있지. 그리고 배를 제안함으로써 버지니아에게 자신이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자신은 비밀을 다 알고 있다는 점을, 국민들의 안녕보다는 방구석에 처박혀 수수께끼 푸는 일에 더 신경을 쓰는 여왕들은 그저 주는 것만 받아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p.122)


집안일엔 관심 없이 맨날 방구석에 처박혀 글만 쓰는 여주인을 은근히 무시하는 하녀. 자기 어머니나 언니처럼 하녀 하나 우아하게 부리지 못하는 자신을 한탄하는 여주인. 그리고 하녀와 여주인이 벌이는 아슬아슬한 파워게임은 하녀가 여주인의 명령에 항의하는 대신 말없이 순무 하나를 꺼내 들고 예리한 칼날로 끄트머리를 싹둑 잘라내는 장면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바로 이 순간 넬리는 순무처럼 버지니아의 목을 기꺼이 따고 싶으리라. 버지니아가 자신의 의무를 게을리해놓고는 배를 내놓으려던, 어른인 넬리를 지금에 와서야 벌하고 있기 때문이다.(p.123)


하녀 입장에서 여자란 자고로 집안 살림을 해야 한다. 아니면 자기처럼 밖에 나가 일을 해서 가족이라도 벌어먹이던가. 내가 뭐 저더러 장을 보고 음식을 하래? 제 방 청소를 하나 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 옷 하나 다릴 줄 모르면서. 아니 애가 있는 것도 아닌 여자가, 기껏 메뉴 하나 정해 달라는 그 걸 못해 맨날 갈팡질팡이나 하고. 남편 하나 잘 만나 맨날 제 방에 틀어박혀 뭘 하는지. 쯧쯧.

저는 음식을 잘 안 하다 보니...
- 그럼 직장 다니세요?
아뇨. 집에 있는데요.
- 아니... 그럼, 집에서 뭐하세요?
(요리 하는 거 말고도 집안 일 수두룩 빽빽이거든요?)
아니 이 엄마, 이렇게 정보력이 없어서야. 어디 애들 지방 대학이라도 보내겠어?
(왜 무조건 대학이어야 하는지, 그 질문부터 하고 있습니다)

친구 남편이 이번에 크루즈 티켓을 끊었는데, 글쎄 내 친구는 시댁이랑 같이 가게 됐다고 가기 싫다고... 
- 헐,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나 같음 업고도 가겠다
(얼마나 이상하길래, 누구나 부러워하는 그 여행이 망설여질까) 
들었어? 옆집 여자가 죽었대. 그 집 남자 엄청 착한데...
- 그러게. 남편이 여자한테 그렇게 잘했다며? 근데 뭐가 아쉬워서...
(자살자의 남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저는 아내가 왜 죽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나도 하고 너도 하는 늘 쉽게 하는 이야기. 하지만 구체적 정황이나 내밀한 사정 따위 다 생략된, 이 사회 주류와 자본의 논리로 쉽게 재단한, 결국 너는 왜 나처럼 살지 않느냐며, 그래도 내가 너보다 낫지 않냐며 함부로 판단하는 이야기들. 


그런데 잉그램 양. 

너를 거들먹거리게 하는 것 중 네 노력으로 얻는 게 뭐가 있지? 네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가문의 후광은 네 부모님이 물려주신 거잖아. 네 꾀꼬리 같은 목소리와 피아노와 식물에 대한 지식 또한 네가 그렇게 경멸해마지 않던 가정교사들이 네게 전수해 준 거고. 네 몸을 구성하고 기능하게 하는 의식주 중 어느 하나 자연에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고, 네 조상과 네 이웃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는데. 너는 그걸로 지금 기고만장하는구나. 네 이웃을 쉽게 네 발아래 두는구나. 그 모든 것은 물론 네가 이 땅에서 누릴 축복이고 영광임이 분명해. 하지만 네가 얻은 행운과 다른 이들의 수고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 모든 영광 또한 들꽃의 영광보다 못하다는 걸, 너는 알아야 할 거야. 


가진 것을 휘두를 때 인간은 천박해진다. 그가 남자라서 혹은 여자라서가 아니다. 기득 한 그가 자기가 가진 게 특권인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는 만큼 편협하고, 가진 만큼 기득 하다. 


* <세월 The hours>, 마이클 커닝햄 저/정명진 역, 비채.

:  주인공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울프 부인'은 1923년 런던 교외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실제 버지니아 울프를 모티브로 한 인물. 오늘은 언니 바네사가 방문하기로 한 날이지만, 그녀는 아침부터 '댈러웨이 부인'에 대한 구상에 빠져 다른 데 신경 쓸 겨를 이 없다. 현실 속 그녀는 자신의 집 하녀에게 음식 지시조차 내리지 못하는 허약한 안주인이다. 두 번째로 194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살고 있는 '브라운 부인'은 평범한 백인 중산층 가정의 주부. 아들 하나를 두고 뱃속에 또 다른 아이를 임신 중이다. 어찌 된 일인지 오전 내내 남편 생일 케이크 하나를 제대로 만들지 못한 채 쩔쩔매며 자살과 생의 충동 사이에서 시달린다. 마지막 주인공은 20세기 말 뉴욕에서 동성 친구와 함께 살고 있는 편집자 '클러리셔 본'. 옛 연인이자 친구인 작가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파티를 준비 중이다. 하지만 언뜻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그녀의 삶은 에이즈로 인해 불안정해진 리처드의 심경만큼이나 예민해 보인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지 않았다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아이를 낳고 살았다면? 혹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과 작가로서의 성취를 현실에서 이뤘다면? 이 소설은 이런 작가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쓰인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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