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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Nov 24. 2020

19. 밤의 덮개 아래

사랑인가 관습인가

로체스터 씨가 나를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해서,
몇 시간 동안이나 같은 방에 있는데도 내 쪽으로 눈길 한 번 돌리지 않는다고 해서,
로체스터 씨가 바로 이 숙녀와 곧 결혼하리라는 확신이 든다고 해서, 
....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제스처 게임을 하는 로체스터와 잉그램 양을 바라보며, 제인은 비로소 자신이 로체스터를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 두 사람이 서로 눈짓을 하고 그들이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든다 해서 떨쳐낼 수 있는 종류의 마음이 아니었다. 이제 로체스터의 결점이라고 생각했던 가차 없는 태도는 최상의 진미에 들어 있는 톡 쏘는 양념처럼 느껴지고, 속내를 알 수 없는 그의 눈빛은 제인의 가슴을 두근두근 뛰게 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멈출 수 없는 감정. 사랑이었다! 




그는 마흔이 채 안 된 기혼남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몸집이 크고 거만하며 스스로를 사려 깊다고 말하는 천박한 여자다. 그는 평소 여자에 대해서라면  '저급한 인종'이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저급한 인종' 없이는 단 이틀도 살지 못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내 몰래 바람을 피워왔다. 지금도 혼자 얄따에서 휴가를 보내는 중인데, 얼마 전부터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나타난 금발의 베레모 여자를 눈여겨보고 있다. 그의 이름은 '구로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단편소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의 주인공이다. 


금발의 베레모 여자 또한 스무 살 초반의 기혼녀. 혼자 휴양지에 왔다. 한 때 생의 호기심으로 충만하던 이 여자는 어쩐 일인지 일찍 결혼을 했고, 몇 년 간의 결혼생활 내내 헛헛하다. 그녀의 남편은 선량했지만, 그녀 표현에 의하면 노예와 다름없이 사는 남자. 그녀는  '다른' 삶을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과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이곳까지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둘은 이 섬 얄따에서 사랑에 빠진다. 


특별한 매력에 끌린 것도 아니다. 그 남자에게 그 여자는 '어쩐지 애틋한 데'가 있어 보였고, 그 남자는 '좀처럼 알 수 없는 뭔가'가 늘 여자들의 주의를 쉽게 끌었다. 그러니 몇 번 담소를 나누다 호텔에 들어가는 것쯤 그 남자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일. 정사가 끝나자 그녀는 다른 여자들처럼 죄 많은 여인의 얼굴을 하고 남자에게 말한다. "당신은 더 이상 저를 존중하지 않겠죠." 순진한 척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참회가 이어지고, 그는 잠시나마 자신을 소년처럼 서툴고 수줍게 하던 감정이 이내 짜증으로 뒤바뀌는 걸 느낀다.


얼마 후 그녀는 남편에게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여자 또한 그 남자가 이전에 만나고 헤어진 수많은 여자들처럼 선량하거나, 가식적이거나, 천박한 여자 중 하나로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얄따에서의 추억이 어디든 그를 따라다녔다. 눈을 감으면 더 생생하고, 이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그녀가 떠올랐다. 은행 일도, 아이들도 다 귀찮고, 습관적으로 즐기던 카드놀이와 폭식과 폭음 뒤 이어지는 시시껄렁한 농담 따위, 평상시 당연했던 무의미한 일상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12월 휴가가 주어지자 그는 무턱대고 그녀가 사는 도시로 떠난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리석고 한심한 재회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녀와의 비밀스러운 만남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며 그의 사생활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그는 말한다. 이 세상 사람들에겐 두 가지 생활이 있다고. 공개된 생활과 비밀스러운 생활. 공개된 생활은 일하고 가족과 모임에 참석하고 취미생활을 하는, 우리 삶의 뼈대를 이루는 보통의 생활들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진실이지만 나에게는 절반의 거짓과 절반의 진실로 가득 찬, 의무와 습관과 약속으로 이루어진 삶. 반면, 비밀스러운 생활은 나도 모르게 우연히 얽혀 들어 가 어떤 의미를 갖게 된 생활이다. 남들 눈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나 자신에게만은 진실한. 그 속에서라면 더 이상 나 스스로를 속일 필요도, 감정을 감출 필요도 없는 삶. 


그래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경우처럼 남들을 판단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았고, 누구나 밤의 덮개 같은 비밀 아래서 자신만의 가장 흥미로운 진짜 생활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각자 개인의 생활은 비밀 속에서 유지되며,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그런 이유 때문에 교양 있는 사람들이 그토록 예민하게 사생활의 비밀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지도 몰랐다. (p.337)


물론 그도 잘 알고 있다. 젊고 아름답던 그녀도 곧 자신처럼 시들고 바래질 거란 걸. 이 연민인지 사랑인지 운명인지 모를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별반 다르지 않은 그렇고 그런 추억이 될 거라는 걸. 게다가 지금 이 여자가 사랑하는 이 남자가 내 본래의 모습이던가? 여자들은 그를 본래 모습 그대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녀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상상으로 만들어 놓은, 평생 간절히 원하던 그런 사람'으로 그를 사랑했다.  


본래 자신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하는 사랑. 남들 앞에 떳떳하게 내놓을 수 없는 사랑. 그리고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자신의 '거짓된 사랑'이 '진실하다'고 말하는 중이다. 밤의 덮개 아래 감춰진 사생활만이 자신이 진심으로 만나는 세상이며, 나머지는 다 껍데기라는 것. 인간은 어쩌면 이런 보통의 생활 안에서는 진짜 자신과 만날 수 없다는 그 비극 안에 인생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이 계속된다. 오래전부터 고정된 삶의 패턴은 더 이상 나를 새롭게 바꾸지 못하고, 그를 바꿀 힘을 잃었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 주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계속 지금과 똑같을 테지. 그런 몇 달이 모여 1년이 되고, 그런 몇 해가 모여 묵직한 세월이 된 어느 날. 내 어머니가 그랬듯, 너무 늦었다고, 왜 그 때라도  다른 삶을 선택해보지 않았는지 후회가 된다고, 한탄하는 그런 날을 맞이하게 되겠지.  


그런 내 앞에 새로운 사랑이 나타났다. 그 사랑은 나를 뒤흔들고, 지긋지긋하게도 변하지 않던 나를 하루아침에 놀랍도록 바꿔놓는다. 지금의 나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게 만든다. 평생 이룰 수 없어 보이던 것들이 가능해 보인다.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 한다. 그간 빗나간 모든 걸 회복해 보라 한다. 그런 사랑 앞에 나는 무슨 수로 멈출 수 있을까. 그게 본래의 내 모습이 아니면 어떤가. 나중에 후회하게 될 사랑이면 어떤가. 적어도 지금 내 마음이 진심이라는데. 죽은 것 같던 내가 이제 사는 것만 같은데! 


단편 소설의 거장 체홉이 그의 가장 완숙한 시절 썼다는 이 소설이 묻고 있는 질문은 어쩌면 이것인지 모른다.


그런 사랑 앞에 당신을 멈추게 할 무엇을 당신은 가지고 있는가.   



P.S. 

사랑인가. 관습인가. 

그 대답이 당신의 가치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안톤 체호프 저/오종우 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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