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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Nov 26. 2020

20. 그래, 앞날을 알고 싶나?

아무래도 좋아요. 저는 믿지 않으니까요

운명은 아가씨 몫으로 어느 정도 행복을 준비해 놓았지...
손을 뻗어 그것을 차지하는 건 아가씨 몫이야.  p.372


로체스터가 잠시 집을 비운 저택에 점을 치는 이상한 집시 노파 하나가 찾아온다. 아가씨들은 하나씩 그 노파에게 불려 가고, 제인 또한 호기심으로 그의 앞에 섰다. 하지만 그녀는 노파의 끈덕진 질문에도 자신은 그런 류의 미래에 대해선 궁금하지 않으며, 노파의 말을 믿을 만큼 바보도 아니라고 말한다. 노파는 단호한 그녀의 이마와 눈매를 찬찬히 뜯어보고 그녀의 섬세한 감수성과 이성, 당당한 영혼과 자존심을 한껏 칭송하는가 싶더니 돌연, 불빛 아래 자신의 본색을 드러낸다. 그의 이야기에 홀려 귀 기울이던 제인도 그의 변한 억양과 몸짓, 미끈하고 유연한 손, 새끼손가락에 빛나는 굵은 반지를 보고서 그가 누군지 깨닫는다.   




수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원리를 들라면 페르마의 원리, 즉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가 아닐까.

 

물이 반쯤 담긴 컵. 젓가락을 꽂아두면 젓가락이 구부러진 것처럼 보인다. 공기 중을 직진하던 빛이 물이라는 다소 무거운 물질을 만나면서 꺾이는 빛의 굴절 현상 때문이다. 페르마 이전에도 사람들은 관찰을 통해 이런 현상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다. 공기 중을 이동하던 빛은 물을 만나면 왜 꺾이게 될까?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에 의하면 그것은 '빛이 물체에 가닿기 위해 가장 시간을 최소화하는 경로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걸을 때를 상상해 보면 된다. 공기 중에 걷는 것과 물속에서 걷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빠른가. 당연히 물속에서의 움직임이 더 느리다. 그러니 빛이 물체에 빨리 가닿으려면 공기 중에서 보다 물속에서의 이동거리가 짧아져야 한다. 아이가 물에 빠졌을 때 아버지는 직진으로 달려가는 것보다는 아래 그림처럼 물속에서의 이동거리를 짧게 하는 방향으로 뛰어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아이를 구해낼 수 있다. 그래서 빛은 공기에서 물로 진입할 때 꺾여서 이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수학이 필요한 시간> 44~53p 참고)



여기까지는 그저 수학이나 물리 법칙의 영역에 속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원리는 이후 많은 사람들에 의해 어딘지 비과학적이라는 오명을 받으며 더욱 유명해진다. 가령 이런 것이다. 오른쪽 그림처럼 아버지가 아이를 구하기 위해 최단거리를 계산해 달려가는 건 우리의 본성에 자연스럽다. 하지만 '빛'이 최단거리를 계산한다니?  


그것이 바로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빛이 어떻게 판단을 하느냐. 그러니까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최단 거리라는 것을 빛이 '알고' 간다는 것인데, 어떻게 빛이 '아느냐', 이 문제는 철학적인 용어로는 텔로스 Telos'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텔로스는 목적,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수학이 필요한 순간 p.54)
당신은 빛의 굴절을 인과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데만 익숙해 있어. 수면에 도달하는 것은 원인이고, 그 방향이 바뀌는 것은 결과라는 식이지. 페르마의 원리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 건 빛의 행동을 목표 지향적인 표현을 써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야. 마치 광선에 대한 계명의 느낌이랄까. '네 목표로 갈 때는 도달 시간을 최소화하거나 최대화할지어다' 하는 식으로 말이야." (<당신 인생의 이야기> p.199-200)


마치 애초에 목적을 가진 것처럼, 미래를 내다보고 미리 최단거리를 측정해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빛. 그렇다. 페르마의 원리는 이런 속성 때문에 수학과 물리를 넘어 신의 목적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영역까지 확장해서 오래도록 인용되었다.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도 이 페르마의 원리를 모티로 하고 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지구 곳곳에 외계인들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인공물들이 뿌려진다. '체경 looking glass(온몸을 비춰보는 거울)'이라는 별명이 붙은 외계인의 기계 장치. 미국 국부는 그들이 지구에 온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언어학자인 '루이스'와 물리학자인 '게리'를 현장에 투입한다. '헵타포드'라고 불리는 그들은 자유롭게 움직이는 7개의 팔다리와 7개의 눈을 가진 외계 생물체. 그리고 루이스와 게리는 우여곡절 끝에 스크린을 통해 서로의 언어를 하나 둘 습득하게 된다.


그들의 언어는 특이하다. 인간의 언어들처럼 발성기관을 본뜨거나 음성을 반영해서 만들어져 있지 않다. 각각의 알파벳을 조합해 한 단어를 만들고 그 단어를 조합해 한 문장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굳이 말하면 한 단어 안에 주어 목적어 서술어가 동시에 들어 있다(고 해야 하나. 지금부터는 내가 언어학자가 아닌 것을 감안해서 들어주시길). 책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그들의 '몸이 방사상 대칭'인 것처럼 그들의 언어도 한 단어가 어떤 식으로 '결합함으로써' 주어 혹은 목적어가 된다. 한 단어 안에서 획과 곡선을 '변형함으로써' 격을 바꾸거나 의미를 강화하는 식으로 말이다. 


모양으로 따지자면 막 흘려 쓴 초서체, 아라비아 문자, 그래픽 디자인의 집합체가 에셔의 그림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연결하고 있다고 보면 될 듯하다. 루이스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문자는 우리의 문자처럼 순차적으로 발화되면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언어가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한 장에 쓰이는 언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메시지 전체의 문맥을 미리 알고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마치 페르마의 빛이 애초에 자신의 최단경로를 계산해서 이동하는 것처럼! 쓰여지는 순간부터 어떤 목적을 가지고 미리 정해진 미래를 향해 움직이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언어였던 것. 


그리고 루이스는 이 헵타포드 언어에 익숙해지면 질수록, 자신의 사고도 그들이 언어를 구사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가는 걸 느낀다. (결말까지 내리 스포일러;) 그들의 언어에 익숙해 질수록 그들의 방식대로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경험하게 되고, 현재라는 시간 속에 얼핏 끼어드는 자신의 미래와 조우하게 된다. 자신이 게리와 결혼하고 딸을 낳게 될 것이며, 그 딸이 스물다섯에 등반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될 것까지 알게 된다.


미래를 알게 된 루이스. 이제 곧 게리는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 예정이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낳고, 어느 날 루이스는 게리에게 자신이 미래를 알고 있었음을 이야기하게 되겠지. 그리고 게리는 그녀가 자신의 딸의 비극적 죽음을 알면서도, 딸을 낳았다는 사실을 감당하지 못한 채 루이스와 이별하게 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미래를 알고 있다. 이 남자는 당신에게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열어갈 것이다. 그 어떤 것도 비교 우위에 설 만큼 하찮지 않다. 당신은 이 남자를 사랑하는 대신, 이 남자로 인해 슬픔도 겪게 될 것이다. 딸을 얻게 되는 대신 딸의 죽음도 목도하게 된다. 자, 이 남자의 사랑을 거절할 것인가? 딸의 사랑을 거절할 것인가? 딸이 산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막을 것인가. 더욱 훌륭한 산악인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기술을 연마하게 할 것인가.


중요한 건, 미래를 안다고 해서 지금 나의 선택이 꼭 더 가치 있는 선택을 하게 될 거라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운명은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몫의 행운을 준비해 놓았고, 손을 뻗어 그걸 차지하는 건 너의 자유라고. 그 선택이 너의 몫이 될 거라는, 200년 전의 로체스터도 알고, 지금의 우리도 아는 이런 뻔한 충고가 더 유용하다는 사실이 아닐까. (그래서 테드 창은 '미래를 아는 것과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다'고 콕 집어 말한다).  


내가 지금 놀라는 건, 나의 선택에 따라 동시에 내 미래가 결정되고 또 선택하기 전까진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는다는 이런 동시성의 원리가 점점 더 최신 과학으로 증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양자역학이 말하는 '동시에 살아있기도 죽어있기도 한 고양이'나, '우리가 관찰하기 전까진 파동이던 빛이 관찰과 동시에 입자로 바뀐다'는 그런 허튼소리 같은 게 현대 과학이 증명하는 우리의 세계다. 200년 전만 해도 비행기, X선, 핸드폰 조차 공상과학이라고 치부하지 않았나. 그러니 200년 후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거나 공간이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과학적 상상력에 내가 타로 카드보다 더 매력을 느끼는 건 너무 당연하다.



* <수학이 필요한 순간> 김민형 저, 인플루엔셜

*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저/김상훈 역, 엘리

* 영화 <컨택트, Arrival>, 드니 빌뇌브 감독, 에이미 아담스/제레미 레너 주연.

* 헵타포드 문자 : 이 소설을 영화화한 <컨택

트 Arrival>는 이 문자를 또 다른 탁월한 상상력으로 시각화하고 있다. 영화는 소설을 얼개로 좀 더 할리우드 문법에 맞게 로맨스와 음모론을 추가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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