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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Nov 27. 2020

21. 어디서부터 이상해졌는지

당신을 따르겠다던 그 약속

저는 기꺼이 당신을 도와주고 싶고,
옳은 일이라면 뭐든지 당신 말을 따를 거예요.


손님들이 잠든 깊은 밤. 다시 비명이 시작됐다. 누군가 몸싸움을 하는 듯하더니 "살려달라"고 외치는 비명. 놀란 손님들이 모두 방에서 뛰쳐나와 로체스터를 쳐다보지만, 그는 그저 흥분 잘하는 하녀 하나가 악몽을 꾸었을 뿐이라고 얼버무리며 손님들을 돌려보낸다. 이어 조용히 제인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로체스터는 3층 방에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진 남자 하나를 제인에게 맡기고, 의사를 데리러 간다. 절대 아무 질문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며. 벌써 두 번째다. 로체스터와 함께 보내는 이상한 밤. 이 남자에게는 얼마나 더 많은 비밀이 남아 있는 걸까. 수많은 걱정과 질문을 뒤로한 채, 제인은 말없이 그의 명령에 복종한다. 로체스터의 참회인지 사랑인지 모를, 제인을 향한 고백도 계속된다.   




얼마 전 '동창회에 참석하는 것'이 동네 엄마들 사이에서 화두가 됐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나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고 해야 하나. 몇 년 전부터 밴드나 카톡을 통해 잊었던 동창들이 다시 모이고, 옛 추억을 나누고... 그렇게 만난 몇몇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카더라' 같은 소문이 한차례 돌고도 몇 년이 더 흘렀다. 다소 시행착오를 겪은 그런 모임들 중 여전히 살아남은 모임은 주로 시골이나 소도시 지방 출신들이 많은데, 가령 초등학교 때부터 한 동네에서 멱감고 대청마루에서 낮잠의 추억도 공유하는, 초등학교 동창이 그대로 고등학교 동창이 되는, 그런 끈끈한 고향 친구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어느 집 숟가락 개수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 보니 나름 동심이 살아 있는 모임이라고 해도 될 만한. 그러니, 아이들에게 정신없이 올인하다가 뻥 뚫린 중년의 헛헛함을 달래기에 어릴 적 이 모임만 한 것이 없다고 했다.  


문제는 기껏 일 년에 두세 번이나 모일까 말까 한 이 동창 모임에 아내들이 나가는 걸 반대하는 남편들이 대다수라는 것. 네 집 중에 한 집 빼고는 모든 남편들이 명확히 반대 의사를 하고 나섰다. 이유의 상당 부분은 그렇고 저런 썸이 있었다 류의 '카더라' 통신과 남편들이 사회생활을 하며 보고 듣게 마련인 경험치가 어느 정도 작용된 '만의 하나' 때문이 컸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아내들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처사였다.


한차례씩 언쟁이 오고 간 후 나눠진 각 집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1) 배려형 : 아내는 가고 싶고 남편이 가는 것도 상관없다. 하지만 남편이 아내가 가는 걸 싫어하니 굳이 가지 않는다.

2) 수락형 : 아내도 가고 싶고 남편도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가 가는 게 싫어서 본인도 가지 않겠다고 하니, 아내도 갈 수 없다.

3) 주장형 : 아내는 가고 싶고 남편은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도 가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아내는 가고 싶다.

4) 독립형 : 아내와 남편 모두 상대가 가던 말던 뭔 상관?


한 가지 사안을 두고 네 집이 이렇게나 가지각색으로 다르다니! 우리는 일단 한차례 웃고야 말았는데. 문제는 1) 2) 4)는 어떤 형태로든 서로 합의가 된 반면, 3) 어쩔 수 없이 싸움이 불가피하다는 것.


'욕망'에 대해서라면 요즘 '되도록 펼쳐라' 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나로서는 일단 동창회를 가지 못하게 하는 남편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바람이 나서 서로의 약속을 훼손한 것도 아니고, 무슨 이상한 낌새가 생겨난 것도 아닌데.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앞서 먼저 제재부터 하는 게 너무 이상했다. 일단 네 유형을 잠시 분석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배려형의 경우는 모임을 썩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니, 참석을 포기하기가 다른 여자들보다는 쉬웠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일 말고도 평상시 부부가 서로 합의가 잘 되는 편이다. 배려가 서로 몸에 배어 있고 서로 주고 빼고를 잘한다. 대화의 기술과 감 모두 잘 발달해 있다. 2) 수락형의 경우는 사람들을 만나는 걸 무척 좋아하는 타입이다. 나 같은 경우는 1차 모임 한두 시간만으로도 기가 쏘옥 빨린다면, 그녀는 2차 3차 사람을 만나면 만날 수록 에너지가 쑥쑥 살아난다. 그러니 요즘 곧잘 우울감을 호소하는 그녀에겐 이런 모임이 꽤 의미 있는 모임이었을 터. 하지만 평상시에도 남편 의견에 반론을 잘 펴지 않는 그녀로서는, 남편이 아내가 나가는 게 싫어 남편 스스로 절제한다니 별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3) 주장형의 경우는 평상시 살림이며 재테크며 며느리로서의 도리 모두 잘 해내는 스타일. 시골에서 자란 그녀에겐 '의리' 또한 챙겨야 할 중요한 가치다. 그러니 내 욕망이 순수한데 남편 때문에 내 욕망을 제재해야 할 이유를 아직 찾지 못하는 중이다. 너무 당연하다. 마지막 4) 독립형. 눈치채셨다시피, 우리 집이다. 서로의 욕망에 그닥 관심이 없다. 사랑보다는 일말의 신뢰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그러니 상대방이 하는 일에 굳이 토 달지 않는다. 설혹 뭔가 잘못되더라도? 그건 어쩔 수 없다, 거나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된다, 주의.


네 집의 공통점은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신뢰가 탄탄하다는 점이다. 서로의 신뢰에 대해서라면, 어느 집보다 두텁다고 자부할 수 있다. 만에 하나의 불미스러운 가능성 때문이라면? 어느 집이 그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런 일은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랑의 문제일까? 제인처럼 말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얼마나 서로에게 포용적이었나. 비밀에 가득 차 보이던 그의 과거조차 내가 탐험해야 할 미지의 세계처럼 신비롭지 않았나. 한밤중에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내게 맡긴 들 그를 믿었을 것이다. 그땐 그럴 때이기도 했지만, 우린 뭐든지 믿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걸 약속하며 함께 미래를 설계하자고 했다. 근데 그와 나는 왜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주를 구하고 세계 평화를 위한 일처럼 거대한 것도 아니다. 서로의 신뢰를 저버리고 사랑을 확인하는 일처럼 대단하지도 않다. 기껏해야 그 일이 조금 싫고, 조금 걱정되고, 만의 하나 잘못될까 봐, 따위. 고작 재활용 쓰레기를 분류하고 옷이나 양말을 벗어두거나 개키거나, 따위. 그걸 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해낼지 서로 약속하고 실천하는 그 일 따위가 뭐가 어려워서 매번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서로 사니 못 사니 인생을 결정짓는 큰 사안으로까지 비약하게 하느냐 말이다.


너무 사소해서, 그 대단하지도 않은 일이 서로 용납되지 않아서, 그 용납되지 않은 일이 내겐 중요하다는데, 그는 그걸 너무 사소하게 생각해서?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너에겐 사소하고 나에겐 중요한 일이 도처에 널려 있고, 그 많은 일들을 서로 '나 혼자' 맞춰주고 살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나는 지금 그렇게 집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일의 가짓수를 순식간에 화면 한가득 써내려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는 중이다. 침대에서 과자를 먹는 일, 욕조의 수쳇구멍을 치우고 실내화 바닥을 청소하는 일, 외출 후 옷과 신발과 가방을 정리하는 일, 빨래는 널고 개키는 일... 설거지 뒷정리 음식물 쓰레기 깎은 손톱 젖은 수건 냉장고와 다용도실과 베란다 청소 책상과 침대 정리... 그뿐인가. 음식과 헤어스타일과 옷차림, 서로의 취미와 여가와 함께 하는 일에 대한 태도까지. 맙소사. 지금껏 그 많은 일들을 우리가 어찌어찌 합의하며 살고 있었다니! 이런 습관적으로 몸에 밴 일들 이외에 아이와 시댁과 친정과 남편과 아내의 욕망이 빚어낸 그 다양한 이해관계의 서로 다른 가치의 가짓수까지 모두 합친다면?


우리가 사소한 것이라고 치부하던 그 많은 사건들의 이면에 켜켜이 쌓인 미해결 난제들. 서로 합의와 납득을 얻지 못한 채, 호시탐탐 또 다시 무슨 일이 터지기만을 기다린 채 늘어선 그 배후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심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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