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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Nov 27. 2020

22. 성찰 없는 노년

체념한 자의 충고를 조심할 것

평생 갖고 있던 생각을 고치기에는 너무 늦었다.
리드 부인은 살아 있을 때도 나를 미워했고,
죽어 가면서도 계속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한 주 내내 기이한 아기 꿈을 꾼 어느 날. 제인은 게이츠헤드로부터 온 마부로부터 리드 부인이 많이 아프며, 혼미한 상태에서 제인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장남 존은 노름으로 집안의 재산을 거덜 낸 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고 한때 아름다웠던 두 딸은 서로를 증오하기 바쁘다. 제인은 리드 부인의 불행한 말로 앞에 화해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하지만 리드 부인은 여전히 자신이 제인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원망하며 제인 탓을 한다. 심지어 제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3년 전 그녀를 찾는 삼촌 '존 에어'의 편지에 '제인은 이미 죽었다'고 답장한 사실을 고백한다. 제인은 마지막까지 아무런 성찰 없는 리드 부인의 죽음 앞에 더 이상 연민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저 인간이 이렇게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그 불쾌한 번민으로 인해 당혹감이 느껴질 뿐이다.   




한때 내게 가장 두려운 죽음은 비행기 사고로 죽는 것이었다. 다른 수를 써볼 새도 없이 그저 하강하는 비행기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그 시간 혹은 공중에서 몸이 산산조각 나는 상상. 그것만큼 끔찍한 죽음이 없어 보였다. 15살 연상 선배들이 나누는 이런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은주 씨. 우리 나이쯤 되면 생각이 달라져. 우리끼리는 요즘 해외여행 가다가 비행기 사고로 죽는 게 어쩌면 가장 나은 죽음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하거든.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죽는 데다가 자식들한테 보상금까지 물려줄 수 있으니까."


그들이 비행기 사고의 끔찍함을 간과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노년의 비참함을 여러 해 지켜보며 생긴 아주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그들은 몇 년 동안 시어머니의 병시중을 들고 있었고, 인간의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나이 먹은 몸이 얼마나 꾸역꾸역 목숨 부지하는지 너무나 잘 알게 된 것이다.


"난 예전에 치매 걸리는 게 제일 무서웠거든. 내가 누군지 모르고, 내 몸은 대소변을 구분하지 못하고, 나는 아무 데나 그걸 처바르고. 근데 있잖아.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내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는 그 짓을 내가 멀쩡한 정신으로 지켜보는 거야. 그게 더 끔찍하더라고."


그 말을 들은 후부터 나는 나이 들어 몸만 망가지지 말길, 정신도 어느 정도 몸과 보조 맞춰 망가져주길(?)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내 자식들에게는 절대 내 노후를 맡기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내 자식들이 내 아랫도리를 보고 경악하길 원치 않는다. 차라리 아무 감정 없는 간병인에게 돈을 주고 의탁할지언정 자식들 앞에서 그렇게까지 비참해지고 싶진 않다. 무엇보다 간절히 기도하기는 내 몸과 내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전에, 자식들이 눈살 찌푸리며 서로 눈짓하기 전에,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며 나를 병원으로 실어 나르기 전에, 내 집에서 죽는 것이다. 밭일을 하다 땡볕에 쓰러져 죽는 것도, 산책을 하다 앉은 자세 그대로 심장이 멈춰버려도 좋을 것 같다. 그저 병원에 누워 이것저것을 몸에 매단 채 오래도록 누군가에 아랫도리를 내보이는 그 일만 아니라면. 다 괜찮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내 의지를 넘어서는 일이다. 내가 아무리 바란들, 내가 원하는 대로 될 리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기도할 뿐이다.


이제부터 진짜 내가 생각하는 두려움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나는 '성찰 없는 노년'이 가장 두렵다. 이 구절은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이라는 인터뷰집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정확히 그 책에선 '성찰 없는 노화'라고 표현했다. 나는 이 말을 생각할 때마다 이런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루 종일 TV 앞에 앉아있는 노인의 모습이다. 그는 아침을 먹고 TV를 켠다. 점심을 챙겨 먹고 TV를 켠다. 저녁을 먹고 TV를 켠다. TV를 잠이 든다. TV 자리에 핸드폰이나 유튜브 따위를 넣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우리가 주말이나 쉬는 날 주로 하는 낯익은 하루 일과이기도 하다. 정년 이후의 삶을 제대로 설계하지 않을 때 우리가 습관처럼 반복하게 될 그렇고 그런 일상. 사회가, 가족이 더 이상 나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그때. 나는 그 긴 하루를 무엇으로 채울까. 나는 아무런 감흥 없이 매일 반복되는 그런 일상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까 봐, 그것이 무섭다.


또 하나가 있다. 분명 같은 책에서 본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리 찾아도 어딘지 찾아지지가 않는) '체념한 자의 충고를 조심하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해봐도 안되더라, 이제 와서 뭘, 암만 해봐라 되나, 따위의 조소를 입에 머금고 누군가를 내 깔아 보는 그런 이미지. 체념했으면 혼자 조용히 어디 찌그러져 있기나 하면 좋으련만. 감히 다른 이의 희망까지 깔아뭉개며 바락바락 충고를 해댄다. 체념한 자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 중에서도 나를 가장 막막하게 하는 것이 자기 실패를 남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이 집안에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고, 저 새끼가 나한테 땅을 속여 팔아서다. 사회가 죄다 썩었기 때문이고, 대통령이 빨갱이어서다. 내 인생의 실패가 온통 '남'탓으로 점철되어 있다. 내 인생의 선택지 안에 '나'는 없고 '남'만 있다. 아마도 그 선택이 성공적이었다면, 그 자리에 온통 '남'은 없고 '나'만 있었을. 그렇게 남까지 내 수준으로 기어이 떨어트리고야 마는 미성숙함.


그렇다. 나는 요즘 내가 그렇게 미성숙한 채로 늙어 죽을까 봐, 그것이 제일 두렵다. 그들이 나를 있게 하고 대한민국을 있게 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라서 더 슬프다.    



성찰 없는 노년 :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 이진순,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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