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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Nov 10. 2020

15. 속죄

그때의 우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열여덟 살 때는 나도 당신과 똑같았어. 꼭 당신 같았지."


두 번째 부름. 로체스터는 이번엔 제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꼬치꼬치 묻기 시작한다. 여전히 우월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외모는 어떤지, 자신의 어조와 결점에 대해 바보 같다고 생각하진 않은지. 제인은 찬찬히 로체스터를 쳐다보고 느끼는 대로 솔직하게 대답한다. 제인의 관습적이지 않고 순수한 대답에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털어놓는다. 그도 한때는 제인처럼 선량하고 상냥한 마음이 있었다고. 하지만 수수께끼 같은 운명은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고, 그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포자기했다가 결국 타락하고 말았다고. 그렇게 한때 봄빛처럼 기운 찬 풋내기였던 이 남자는 제인에게, 아니 한때 자신과 똑같았던 젊은 로체스터에게 지금  묻고 있는 중인지도 몰랐다. 자신에게도 다시 운명을 돌이킬 희망이 남아 있는지, 과거를 속죄할 수 있는지.  




처음 만나던 당시 남편은 적당하게 보기 좋은 몸집이었다. 지금처럼 뚱뚱하지 않았다. 가끔 그가 이렇게 뚱뚱하게 된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돌봄을 받지 못한 몸. 결혼 후 배가 나오고 살이 붙는 것쯤이야 여느 집 남편들에게도 수순처럼 닥쳐오는 일. 하지만, 둘 모두 전적으로 아이에게 붙들려 살던 시기가 지나고 서로를 돌아볼 여유가 생길 때쯤이면 다시 식단이니 운동으로 서로 조절을 해대기 마련인 것을. 우리에겐 그런 게 없었다. 육아가 끝날 때쯤엔 서로의 일이 확연히 분담되어 더 이상 함께 할 교집합이 없었던 거다. 


남편은 돈을 벌어오고 자동차를 관리한다. 나는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한다. 여행을 가게 될 때도 마찬가지. 내가 내 짐과 아이 짐을 싸면, 남편은 자신의 가방을 꾸렸다. 한때 캠핑을 다닌 적이 있는데, 남편은 그때도 전실까지 갖춘 6-8인용 텐트를 혼자 쳤다. 그 일은 본인의 일이기도 했지만, 내가 어설픈 각도로 폴을 잡고 있거나 헐겁게 매듭짓는 것 자체를 못 견뎌했다는 게 더 옳은 말일 거다. 그렇다. 남편은 제대로 하는 일을 좋아했다. 나는 늘 내가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 봐 자신이 없는 사람이었고.


서로의 자리에게 각각 자기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내는 것. 톱니바퀴처럼 착착 맞아떨어지는 그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틀렸다. 이제는 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훌륭한 육아서, 부부관계와 인간관계를 서술하는 책에서는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서툴더라도 함께 할 것. 그 과정을 소중히 여길 것. 부족하기 때문에 서로 용납하는 관계로 나아갈 것.  


혼자 하는 일은 얼마나 편한가. 내가 원하는 데로 뭐든 할 수 있다. 상대방으로 인해 내 의도가 손상되거나 왜곡되지 않는다. 혹 그 일의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나 혼자 짊어지면 된다. 네가 중간에 이렇게 변경하자고 해서 그르쳤다고 속으로 탓할 필요도 없다. 내 치부가 드러나더라도 나 혼자만 알면 된다. 얼마나 말끔한가.


그에 비해 함께 하는 것은 얼마나 구차한 일인지. 나보다 더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는 늘 자기가 옳다. 내가 아무리 내 경험과 객관적인 데이터를 들이밀어도 꺾이지 않는다. 심지어 왜 너는 맨날 내 얘기만 안 듣냐며 기분 나빠한다. 그러다 예전에 결론 나지 않은 채 끝났던 비슷한 일이 떠올라 사태가 악화된다. 실랑이가 길어진 사이 최선이라 생각했던 선택을 놓치고, 그가 벌려놓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대신 무능한 사람이 되거나 번거로운 일이 말려들기도 한다. 얼마나 지저분한가. 


싸이월드에 육아휴직 기간 동안 짬짬이 기록한 글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마 이렇게라도 기록하지 않았으면 영영 몰랐을 남편의 모습이다. 첫 아이를 낳고 쓴 <마음>이라는 제목의 글.


2006.01.28. 마음 >

나 : 자기~ OO가 밤새 땀을 많이 흘렸네. 베갯잇이 다 젖었어.
남편 : 그래? 이리 줘. 내가 오늘 빨래 한번 돌릴게. 

어느 날 아침 나는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쑥, 던진 남편의 한마디에 감동을 한다.
그 말, 언제라도 몸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는 그 말 한마디에. 


이게 어느 집 남편 이야기던가. 싸이월드에 내가 쓴 것이 분명한 그 일기장 속 남편은 육아로 지친 나를 위해 욕조에 따듯한 물을 받아주던 남자였고, 아기 똥이라도 찍어 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였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밤새 울어대던 아이를 배에 얹고 아내 대신 재워주기도 했던 그 남자. 하지만 둘째 아이가 태어나고 3개 월만에 내가 다시 직장에 복직했을 때, 그 남자는 더 이상 없었다. 


2008.10.30. 퇴근하려는데 >

퇴근하려는데 그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나 일찍 들어가니까 서둘러 오지 않아도 돼. 예비군 훈련 왔거든.”
여느 때 같으면 반가웠을 그 멘트가 아무렇지 않았다.
그가 저녁에 아무 연락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게 된 날 이후부터다.
그것이 나에 대한 배려 없음이 아니라 그의 일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며, 
여차하면 나는 집에 들어앉을 사람이고,
궁극적으로 생계를 이끌 사람은 남편이라는 것을
머리로 너무너무 이해해 버리게 된 이후부터이다.
그의 무심함에 깨끗이 마음 비웠듯, 나는 이제 그의 호의에도 움직여지지 않게 되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그의 눈을 쳐다보지 않게 된 것이. 저녁마다 그를 기다리는 일마저 그만두게 되자, 싱글일 때도 몰랐던 외로움이 덜컥 덜컥 밀려들었다. 함께여서 더 외롭다는 말도 그때 알았다. 한 번씩 분노로 부글부글할 때마다 내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던 친구가 어느 날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은주야.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잖아. 그 말은 상대방을 위해서 그러라는 말이 아니야. 분을 품으면 그게 독이 되거든. 그럼 그 독이 나를 상하게 하기 때문이야.” 


악의로 가득한 내 말을 오랫동안 받아내며 그 친구, 많이 멍들기도 했겠다 싶다. 친구 말처럼 상처와 미움이 다시 나에게 독이 되어 꽂히는 일만은 막아야 했기에, 나는 그 뒤로 내 감정을 어딘가에 동면시켰던가. 일기장은 그 시간 이후를 더 이상 기록하고 있지 않았다. 


손상되어 아무런 감각도 남아 있지 않은 줄 알았던 그 시절들이 요즘 자주 오버랩된다. 어느 순간부터 첫째 아이의 눈을 잘 쳐다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네가 나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 감정이 많이 상한다고. 너를 위한 내 충고를 무시하다가 네 인생이 어느 순간 돌이키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까 봐, 네가 너무 멀리 가서 좋은 삶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될까 봐 걱정된다고. 그런 너의 무신경 앞에 내가 너무 낙심해서, 네 아빠에게 얼어붙었던 것처럼, 너에게도 그리될까 봐 두렵다고. 


내 안 깊숙한 곳으로 너를 동면시키기 전에 나는 오늘 꼭 

아이를 붙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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