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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Nov 02. 2022

천국에서 영원히... 언제까지 영원히?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의 허약한 직관에 대하여



꽤 오랫동안 나는 천국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내가 천국에 가지 못할까 봐, 가 아니라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우리가 흔히 천국과 지옥에 대해 갖게 되는 오해는 '영원히 사는 것'이 우리의 직관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영원히 좋을 수는 없지 않나. 어떤 것이 좋은데 계속 좋아. 끝도 없이 영원히. 언제까지 영원히? 계속 계속 영원히! 죽음이든 마감이든 졸업이든, 무슨 일이든 끝이 있음을 인지하며 사는 인간으로서는, 그 영원을 가늠할 재간이 도무지 없었던 거다. 


지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정의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도 한데,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그 끔찍한 지옥에 '영원히' 가둬둘 만큼 잔인할까? 영혼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토록 오래오래 끝까지 기다리시는 그분이? 정의와 사랑. 우리 인간에게는 상반된 두 개념을 동시에 끌어안을 만한 상상력이 부재하다. 그래서 단테도 지옥과 천국 사이에 연옥을 끼워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천국과 지옥의 영원성에 대해 말할 때 우리가 '그때엔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거야. 차원이 달라질 거야'라고 하는 말도 같은 불안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인식의 틀이 달라지지 않는 한 천국은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사방은 온통 에셔의 그림처럼 무한 반복되는 밀실이 되고, 아무리 벽을 쳐도 상대에게 가닿지 않는 불통의 공간과 같지 않겠는가.


영원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는 150년 전 다윈이 처음 '진화'라는 개념을 제시했을 때에도 똑같이 맞닥뜨린 질문이었다. 기독교인 일색인 유럽 사회에서 당시 인류의 역사는 고작 6000년, 길어야 1만 년 정도였다. 그들에게는 '아담은 누구를 낳고... 몇 백 년을 살았다'는 성경의 연대기 외에 인류의 시간을 가늠할 도구가 없었다. 인류는 이제 갓 망원경을 통해 우리가 사는 지구 이외에도 무한한 별과 그 별을 호위하는 행성들이 존재한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다. 현미경을 통해 인간의 눈에 안 보이는 미생물의 세계가 있다는 걸 목도하는 중이었다. 땅을 깊이 파내려 가며 생전 처음 보는 생물의 화석을 발견하고 놀라는 중이었다. 똑같아 보이는 붉은 피 안에도 혈액형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중이었으며, 마약과 강장제라는 두루뭉술한 약 말고 병증에 맞는 약이 따로 있다는 걸 입증하는 중이었다. 새로운 원소가 마구 발견되고 있었지만 그것이 방사성 연대측정을 통해 지구의 나이를 46억 년이라고 정의할 때까지는 다시 몇십 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 다윈이 갈라파고스의 핀치 새 연구를 통해 '종의 기원'이라는 종의 분화를 이야기했을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걸 상상할 인식의 도구가 부족했다. 프랑스혁명 등을 통해 민주적 가치가 바야흐로 움트던 시절이었지만, <종의 기원>이 발표되던 1859년을 살아가던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이전 가치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평민-귀족-성직자-왕으로 신분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었고 또 평생 계급이라는 수직적 질서에 종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인류를 지배해온 핵심적 가치관이었다. 세상을 하등 한 것에서 고등한 것으로 나누는 것에 익숙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동물과 인간이 한 뿌리에서 분화되어 나왔고, 더 우월하거나 하찮은 것은 없다'는 인식은 신에게 부여받은 인간 고유의 특별함을 동물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었기에 대중의 반발을 샀다.


하지만 150년이 지난 지금. 다윈과 그의 이론은 지난 천년 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가 되었고 모든 학계가 인정한 정설이 되었다.  


놀라운 건, 유독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만 진화가 여전히 150년 전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진화에 대해 물으면 여전히 "어떻게 원숭이와 인간이 똑같아? 그게 믿어져?"라고 대답한다. 유인원과 원숭이의 차이도 모르고, 우리 인류가 왜 원숭이보다 침팬지와 가까운지도 모른다. 우리가 학교에서 귀동냥으로나마 들은 그 많은 호모 족 - 즉 호모 하빌리스, 호모 루덴스, 호모 에렉투스 등이 지금의 우리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와는 어느 시점에서 만나지고 갈라졌는지, 그 사이에는 얼마나 복잡한 진화의 가지가 사방으로 뻗쳐 있는지, 우리는 그 가지의 지극히 일부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가 모든 학문에 대해 알아야 하고 정통해야 할 이유는 없다. '진화'에 대해서도 모를 수 있다. 하지만 모르면 "모른다"라고 하면 되는데, 자꾸 그걸 "어떻게 믿어?"라고 묻는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닌데, 과학의 틀 안에 욱여넣고 자꾸 짜 맞추려 한다. 마찬가지로 진화는 과학인데, 이상한 믿음의 문제로 뒤바꾼다.


우리가 하루 종일 들여다보는 핸드폰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를 통해 작동한다는 걸 알고, 이 모든 게 과학적 연구와 성취의 결과이며, 그 결과가 가져다준 이 눈부신 편의를 떼어내고서는 이제 단 한순간도 일상을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었으면서도... 그것과 똑같이 수많은 과학적 연구 방법과 철저한 학계의 검증을 통해 정설로 인정하고 있는 진화에 대해서 유독 우리나라 기독교인만 무관심한 걸까. 


내가 진화에 대해 조금 귀동냥하면서 느낀 건, 진화는 '시간'과 '변화'를 이야기하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 오랜 세월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 생물이 되고 빛과 환경에 반응하며 감각기관을 얻고, 마침내 몸의 각 부분이 물과 뭍에 맞춰 사지를 뻗으며 때론 하늘을 날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며 수많은 종의 다양성을 퍼뜨리던 시간. 그 시간을 상상하는 것에는 어떤 생명의 장엄함이 깃들어 있었다. 내게 과학자들은 그런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함으로써 신의 창조 원리와 질서를 발견하는 영광을 얻은 사람들이다. 그 옛날 동방박사들이 별을 관찰하고 아기 예수의 탄생이라는 특별한 날에 함께 참예하는 영광을 얻은 것처럼.


하나님은 진화라는 방식을 통해 세상을 작동하게 하셨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의 어떤 점을 위배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기독교야말로 변화의 종교가 아닌가. 한 종이 다른 종으로 변화하며 분화해 가는 그 무수한 시간을 상상하며, 나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한다. 동물, 식물, 미생물, 화학, 물리, 지구, 우주, 뇌과학, 그리고 진화를 다룬 책 언저리를 맴돌며 나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질서의 비밀을 조금씩 알아가는 기쁨을 느낀다. 그 깊고 넓은 세계의 다양함과 경이로움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


나는 오늘도 엎드린다. 고작 100년짜리 직관으로 감히 천국의 영원함을 가늠해 보려던 나의 불온함을 내어놓는다. 마찬가지로 고작 100년 짜리 직관이 하나님의 세계를 제한하지 않도록 진화의 오랜 시간 앞에서도 활짝 문을 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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