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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Nov 03. 2022

주일날 가장 은혜받는 사람은?

- 키르케고르의 무(nothingness)에 대한 오해



11월은 늘 내게 성탄절을 준비하는 시기로 기억된다. 학생 때. 어느 해는 요셉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마리아 역을 했고, 또 어느 해는 입술을 조커처럼 칠한 뒤 선량한 크리스천을 유혹하는 악마 역을 하기도 했다. 12월이 되면 작년에 쓰던 크리스마스트리를 찾아내어 교회 여기저기를 장식했다. 입구에 리스를 걸고 '축 성탄' 같은 문구를 만들어 강대상 위에 걸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압권은 단연 '올나잇'이었다. 우리는 성탄절 행사를 마치고 난 시원섭섭함을 밤을 함께 지새우며 달랬다. 집 밖에서 자본 적 없는 학생들에겐 그때가 공식적으로 외박이 허용되는 날이기도 했다.


성탄 선물과 카드를 나누고, 게임을 하다가 보면 어느덧 12시. 그때부터는 삼삼오오 흩어져 새벽송을 돌았다. 짝사랑하던 교회 오빠가 같은 조가 되길 바라며 설레었던 밤이 기억난다. 교인들 집 앞에서 누군가 조용히 신호를 넣으면 성탄송이 시작됐다.

"노~엘~~ 노~엘, 노~엘, 노 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나는 특히 세 번째 노엘의 '엘'에 맞춰 치고 올라가는 테너 파트를 좋아했다. 마치 예수 탄생을 알리기 위해 하늘로 치켜든 천사의 비파 음률 같았다. 


그때도 참 이상했는데, 성탄 축하 공연이 끝나고 나면 그렇게 외로움이 훅, 하고 밀려들었다. 사람들은 그것도 자기 의가 남아 그런 거라며, 그런 공허함마저 온전히 하나님께 드야 한다고 내게 충고했지만... 한편으로 그 적적함이 좋기도 했다. 뭔가 다 내어놓은 사람의 적요함. 구약 시대 때 제사 전까지 자기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 애쓰던 아론도, 감사의 일천번제를 드린 솔로몬도 그 모든 피의 제사가 끝난 뒤 이런 적요함 한가운데 앉지 않았을까. 사람으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큰 이적을 행한 뒤 요나에게 찾아온 공허함도 이런 종류의 마음일 것 같다. 하나님의 권능에 붙들려 잠시 사용된 뒤 이제 비워진 인간 도구의 비애 같은.


우리 교회는 주일 예배 때 마지막 송영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를 부르는데, "주의 영광 온 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에 이를 때쯤의 목사님 얼굴에서도 나는 이 같은 적요함을 본다. '모든 걸 이루었다'와 그 이루었다는 사실에 대한 영광과 감사까지도 모두 다 돌려 드리려는 자의 얼굴. 몇주 내내 내 영혼이 왜 이리 목마른 지에 대해 골똘했는데, 이번 주 마지막 송영을 부르는 목사님 얼굴을 보다가 불현듯 깨달아졌다. 예배에서 가장 많은 은혜를 받는 사람은 바로 목사님 자신이겠구나. 그 사실 얼마나 당연한가에 대해.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에 비추어 내 삶을 겸비하고, 오늘 받은 은혜를 어떻게 설교에 다시 새겨 넣을지 일주일 내내 고민한 사람. 말씀과 뒹굴며, 말씀대로 살지 못한 자신에 실망하고, 으르렁 거리며 말씀과 씨름한 사람. 그 사람의 간증이 곧 설교였다. 그러니 이 날을 위해 가장 많은 것을 준비한 사람이 가장 큰 은혜를 받는 게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에겐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키르케고르. 그는 모든 국민이 기독교인인 덴마크에 살면서 기독교인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에 대해 과연 그러한지 끊임없이 의심하던 신학자이기도 했다. 키르케고르의 신학자적 면모가 담긴 책을 꾸준히 번역해 내고 있는 카르마 아카데미의 이창호 목사님에 의하면, 그의 신학적 논지 중 '무' 즉 'nothingness'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이걸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허무주의에 가까운 '니힐'로, 또 불교의 자기 비움인 '공'개념과 비슷하게 해석하기도 하지만, 키르케고르가 말한 '무'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이들과 다다고 한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기독교 개념의 ''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무로부터의 창조의 무(creatio ex nihilo).' 두 번째는 '은혜의 개념으로서의 무'라고 한다. 이 두 번째 무의 개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무릎 꿇을 때,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내가 철저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 즉 '무'가 되었을 때를 의미하는데, 키르케고르는 이것을 가리켜 '예배'라 불렀다고 한다.  


"이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무, 즉  'nothingness' 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의 실존 중에 가장 높은 실존에 오르게 되는데요. 여기서 키르케고르의 사상인 '완전성'의 개념이 나옵니다. 이것은 다시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연결되죠. 하나님도 일하신다는 개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동역자가 되, 비로소 일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래 유튜브 인용)


자기 비움, 예배, 동역, 완전성, 하나님의 형상...  인간 예배를 통해 어떻게 자신을 비우고 그분의 형상에 이르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이 이론이 너무 환상적이라 듣자마자 숨이 탁, 막혔다.  


이번 성탄절은 그렇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준비하며,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그분의 영광을 위해 준비한 모든 걸 비우 그날. 나를 찾아왔던 그 옛날 그 적요함을 다시 만나고 싶다.  

 


[유튜브] <오늘의 신학공부>, 한국교회가 새겨들어야 할 키르케고르의 일침!, 이창호 목사 편.

[헤드 사진] <위키미디어> 쇠렌 키르케고르. 닐스 크리스티안 키르케고르가 1840년에 그린 키르케고르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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