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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Nov 17. 2022

천국은 안에서 닫은 문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바리새인으로 끝날 때

기독교는 정말 이상한 종교다. 내 아들의 표현에 의하면 '죄인'을 강요하는 '변태적'인 종교다. 죄인이 되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나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을 만큼 나쁜 인간이란 '실존적 자각'이 있어야,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다. 나 스스로 나를 구원할 수 없기에 내 죄를 대신 지고 갈 흠 없는 속죄양 '예수'가 필요하다. 따라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겐? 당연히 예수가 필요치 않다. 이미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의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가 살아생전 가장 많이 비판한 이들 또한 의인 중의 의인, 즉 바리새인들이었다. 바리새인은 '거룩한, 분리된 자'라는 뜻으로 율법을 일점 일획까지 철저하게 지켜내기 위해 애쓰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탐욕, 불의와 가장 거리가 먼, 누구보다 착하게 살려고 애쓰던 열심당원이었다. 그런데 왜 예수는 그들을 그토록 책망한 걸까.


추리소설 작가로 유명한 애거서 크리스티가 3일 동안 단숨에 쓰고, 완벽하게 만족했다는 소설 <봄에 나는 없었다>에 그 이유가 나온다.  



조앤. 그녀는 마흔여덟의 세련된 중년 여성으로 다정하고 유능한 남편 로드니와 함께 런던에서 살고 있다. 남편의 법률사무소는 승승장구하고 있으며, 그녀의 세 자녀 모두 좋은 사위와 며느리를 맞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다. 그녀는 얼마 전 아픈 막내딸을 간호하러 바그다드에 왔다가 지금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막내딸의 병환은 어느 정도 호전이 되었고 막내딸 내외는 그녀의 방문을 고마워하며 좀 더 머무르기를 청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남편을 더 이상 하인들 손에만 맡겨둘 수 없어 서둘러 길을 나섰다. 하지만 그녀의 다급한 마음과는 달리 기차는 폭우로 연착이 되고, 그렇게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숙소에서 며칠 발이 묵이게 되면서 그녀는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인 '블란치'를 만난다.


블란치는 한때 모든 여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졸업 후 무슨 일인지 인생이 제대로 꼬여버린 친구다. 늘 모험을 즐긴다는 핑계로 여기저리 떠돌아다녔고,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애정 행각을 벌이질 않나, 무능한 남자들과 연이어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살고 있었다. 조앤 자신이었다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인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이번에도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더니 거침없이 자신의 비도덕과 실패로 얼룩진 경박한 인생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떠벌리며 조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곤 조앤이 막내딸 바버라의 집에 다녀오던 중이라고 하자 갑자기 자신에 대한 '~카더라 통신'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바버라가 불행한 가정에서 도망치기 위해 맨 처음 청혼한 남자와 서둘러 결혼했다는 둥, 남편 로드니가 늘 호시탐탐 연애할 기회를 노리는 남자였다는 둥.  


그날 밤. 그녀와 헤어진 후 불쾌함을 억누를 수 없었던 조앤은 잠들 기 전 자신의 뒤숭숭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두서없이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불쌍한 블란치-제가 그 여자와 다르다는 데 감사드립니다..."

  

문제는 다음 날부터 그녀가 문득문득 이상한 상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것. 작열하는 태양 아래 기약 없는 기차를 기다리는 그녀에게 어딘가 묻어두었던 기억의 편린들이 도마뱀처럼 툭툭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퍼즐들을 하나 둘 끼워 맞추며 그녀는 비로소 감춰둔 자신의 진실과 만나게 된다. 자신의 막내딸이 사실은 자신의 방문을 전혀 원치 않았으며, 남편도 그녀가 바그다드로 가지 못하게 말렸지만 자신은 그저 '좋은 엄마' 소릴 듣고 싶어 이 여행을 강행했다는 사실을. 막내딸 내외가 떠나려는 자신을 좀 더 잡아두려고 했던 이유도 되려 런던에 있는 남편에게 자유로운 시간을 갖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막내딸 또한 사실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휘말려 있었지만, 가족 모두 자신에게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입을 맞추며 쉬쉬하고 있었다. 딸은 친구 블리치의 말처럼 엄마인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성급하게 결혼으로 도피했고, 그로 인해 다시 실수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었다.   


한번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자신이 딸네 집으로 떠날 때, 기차가 떠날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고 성큼성큼 뒤돌아가던 남편에 대한 진실도 다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자신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줄 알았던 남편은 그저 자식과 아내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원치 않는 직업에 묶여 살고 있는 불행한 남자였다. 그녀의 남편이 딱 한번 그녀에게 법률 사무소를 그만두고 농장을 경영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확신에 찬 어조로 그의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생각인지 깨우쳐 주며 그를 설득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해 이렇게 칭찬하며 안도했다.


여자가 안 챙기면 남자는 인생을 엉망으로 만든다니까.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자들에게는 안정감이, 현실감각이 있다... 그랬다, 그녀가 있어서 로드니에게는 다행이었다. (46p)


그녀는 한때 자신의 남편이 농장을 경영하던 우스꽝스러운 여자 '레슬리'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레슬리는 조앤 자신과 완전 다른 여자였다. 레슬리는 농장에 대한 이야기라면 눈빛을 반짝이는 시골 여자로, 그녀의 남편이 불미스러운 일로 교도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도 자신의 아이들에게 아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주는 이상한 여자였다. 조앤이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깨져버릴 수 있으니 교도소에 있다는 사실을 숨기는 게 더 좋지 않겠냐"고 충고했을 때, 레슬리는 그때도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가장 견딜 수 없는 현실의 일부라도 아이들이 부정하지 않기를 바라요."


현실이 생각한 데로 굴러가지 않는다 해서 숨기는 건 더 안 좋으며,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연약하거나 이상주의적이지 않다고. 그리고 조앤은 자신의 남편이 그런 이상한 여자에게 끌렸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어서 지금까지 레슬리 대신 젊고 매력적이었던 '랜돌프'를 자신의 연적으로 둔갑시키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된다. 차라리 상대가 랜돌프라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아가씨였으니까, 자존심이 덜 상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식으로 점철된 자신의 과거와 하나 둘 마주하며 충격과 비탄에 빠진 조앤. 그녀는 마침내 기차가 도착하자 기차 안에서 이렇게 다짐한다. 집에 가면 남편에게 그간 자신의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리라.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에게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참회와 구원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집이 얼마나 편하고 반갑던지! 끔찍한 숙소와 사막에서의 묘한 체험은 환영인 듯 불쾌한 기억으로 순간 뒤바뀌어 버린다. 언뜻 자신의 아내에게서 이상한 변화의 공기를 감지한 남편. 그녀에게 여행에 대해 묻지만 그녀는 주저 없이 "진저리 나는 공허한 황무지일 뿐이었다"고 대답한다. 역시 그녀는 예전과 전혀 다름이 없는 그의 아내였다. 그 길로 서재에 들어간 남편은 아내가 런던으로 출발하자마자 딸 바버라에게서 온 편지를 꺼내 든다. 그곳엔 '엄마가 다행히 아무것도 모른 채' 돌아갔으며, 처음엔 엄마의 방문 소식에 끔찍했으나 그럭저럭 잘 넘겨서 다행이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편지를 읽고 난 남편 로드니는 혹시라도 자신이 갑자기 죽는다면 아내가 서류를 정리하다 이 편지를 발견하고 불필요한 고통에 시달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딸의 편지를 그대로 벽난로에 던져버린다.


자기 앞에 열린 구원의 문을 안에서 스스로 잠가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한 사람의 열망은 얼마나 강렬한지, 구원의 길을 알고도 돌이키지 않는다. 지옥은 밖에서 걸어 닫은 문이 아니라 안에서 걸어 잠근 문이라는 C.S. 루이스의 유명한 말처럼, 천국도 어쩌면 이렇게 안에서 걸어 잠근 문일지 모른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자각. 그 실체를 아는 것은 그만큼 끔찍하고 피곤한 일이다.


<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서 크리스티, 공경희 역, 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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