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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Mar 09. 2023

권리를 주장하는 태도들에 관하여

청소기 수리 맡기고 진상고객 되던 날



얼마 전 진공청소기가 고장 났다. 손잡이 버튼을 누르면 모터가 작동하는 방식의 무선 청소기였는데, 잘 작동하다가 갑자기 끊기는 현상이 며칠 반복되었다. 처음엔 손가락에 힘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며칠이 지나자 풀로 충전을 해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몇 년 전 큰맘 먹고 장만한 고가의 진공청소기였다. 집안일 중에서도 청소에 가장 취약한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청소기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장비를 핑계로 대충 청소를 뭉개려던 속셈!)  하지만 집안에 개털이 날리기 시작하자, 더 이상 부직포로 미는 청소기만으론 감당이 안되었다. 이때다 싶어 남편에게 요즘 핫하다는 '이걸' 사주면 청소하는 새사람이 되겠다,는 알랑방구를 끼고 청소기를 집안에 들였다. 가격이 다른 청소기의 2-3배쯤 되는, 그러니까 나로서는 1-2년 만에 이렇게 쉽게 망가져서는 안 되는 고가의 가전제품이었던 셈이다. 


검색을 해서 가까운 동네 고객센터를 찾아갔다. 담당자는 증상을 듣자마자 일종의 손잡이 접촉 불량이라며 수리비는 공짜라고 했다. 다만, 지금 해당 부품의 수급이 원활치 않아서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내가 얼마나요? 라고 물어보자, 담당자는 잠깐 망설이는가 싶더니... 기간을 특정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네에? 정확한 기간이 아니더라도 한두 주인지, 아니면 한두 달인지 정도는 알아야 저도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을까요? 하고 재차 물었는데도 담당자는 그저 수급이 되는대로 수리 중이니, 필요한 경우 그동안 사용할 대여 청소기를 신청할 수는 있다고 했다. 그런데, 수리를 맡기는 데서 청소기도 일괄로 빌려야 하는데, 동네 고객센터에서는 지금 대여  청소기를 전혀 구해 드릴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대여 청소기는 본사에서만 접수를 받는 상황이라는 것. 그러니 본사에 연락을 해보라는 것이다. 


"정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최근에 여기에서 고장으로 접수된 건이 몇 개 정도 있는지, 그리고 가장 오래 기다린 게 언제인지 정도는 알아야 저도 대략 가늠하고 본사에 연락을 해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랬더니 주섬주섬 리스트를 체크하던 담당자가 가장 오래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작년 12월로 딱 2달 전이라고 했다. 상식적으로 그럼 저도 2달 정도 걸린다고 보는 게 맞겠네요? 내가 반문하자, 담당자는 그 정도는 아닐 수도 있다며, 부품이 국내에 들어오면 본사와 각 지점으로 골고루 나눠지고 많은 경우 7-8개씩 들어오기도 한다고 언급했다. 그래도 특정할 수 없는 상황이니 나는 2달 동안 청소기 없이 지내야 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했고, 그렇다면 아무래도 본사에 수리를 맡기고 대여 청소기도 그쪽에서 받는 것이 나을 거 같았다.


본사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본사라고 특별히 나을 게 없었다. 상담원은 역시나 같은 얘기를 되풀이했다. 부품 수급이 지연되고 있어 수리 기간을 특정할 수 없고, 본사 역시 현재 대여품을 보내드릴 수 있을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동네 지점에 물어본 것처럼, 최근 고장 접수된 리스트가 몇 건 정도이고 어느 정도 사이클로 수리가 완료되고 있는지 질문했다. 나로서는, 그래도 본사가 동네 지점보다는 더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움직일 거라 생각했고, 그래야 내가 동네에 맡길지 본사로 보낼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담원은 접수건수도, 수리 기간도, 대여 상품 확보에 대해서도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확정할 수 없다고 했다. 순간 내 안에 무언가가 불쑥 머리를 치받으며 올라왔다. 


"아니, 아무 정보도 주지 않으면서 그냥 나보고 판단하라고 하면 저는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할까요?"


수화기 너머로 어느 순간 내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싶었는지, 상담원은 기계처럼 빠르게 매뉴얼을 읊어댔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대신 청소기를 보내주시면 수리 후 무료로 클리닉을 해드리고... 보내드리는 케이스에 해당 부품을 안전하게 싸서 보내주시고 보관은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이미 상담원의 안내는 더 이상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객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 채 매뉴얼 대로 안내하고 있다는 건, 상담원 선에서 지금 문제를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나도 판단을 내릴 수 없어 넋 놓고 안내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당부인지 귀책사유인지에 모를 것에 대해 설명하던 목소리가 어느덧 "혹여나 2만 원의 비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이점 양해를 부탁드리며..." 하는 부분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이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라고요? 게다가 무료가 아니라 비용이 들 수도 있다고요?? 


내 목소리가 격앙되자, 수화기 너머로 상담원이 순간 멈칫했다. 물 흐르듯 하던 목소리가 뒷걸음치듯 추욱 뒤로 밀려나는가 싶더니 브레이크에 걸린 것처럼 그때부터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잔뜩 겁을 집어삼킨 그 목소리를 듣고 그제야, 나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서둘러 당신한테 내가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저 고객이 지금 이렇게 화가 나 있으니 좀 더 대처를 잘해 달라고 윗선에 얘기해 달라는 차원에서 하는 얘기다,라고 서둘러 사과를 하고, 접수를 진행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전화를 끊고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이 해당 제품은 1년 전부터 동일한 고장으로 여러 고객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처음엔 10만 원이 넘는 부품 비용도 받고 수리해 주었으나, 같은 불량이 대거로 접수되자 지금은 무상으로 고쳐주고 있는 듯싶었다. 이 정도면 리콜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집으로 택배 하나가 도착했다. 언제인지 특정할 수 없다던 청소기 대여품이었다. 받는 순간 반가운 마음 보다 바로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 내가 진상고객이 되었구나! 내 이름으로 된 기록에 어떤 메모가 남겨졌을지 뻔히 보였다. 


진상고객으로 최우선 처리할 것. 


그렇게 나는 진상고객이 되어 몇 주인지 몇 달인지 기다려야 될지 모를 대여 청소기를 바로 다음날 택배로 받았다. 나도 모르게 몇 주인지 몇 달인지 모르고 기다리던 다른 고객들의 순서를 가로챘다. 내 권리를 되찾기 위해 그들의 권리를 빼앗았다. 


하,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저 고장 난 청소기를 고치고 싶어 전화 한 통을 걸었을 뿐인데, 어느새 진상고객으로 둔갑한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완벽한 청소기가 아니라서 화가 난 게 아니다. (지나치게 고가이긴 했지만) 애초에 잘못 만들어질 수도 있고 쓰다 보면 고장 날 수도 있다. 문제는 잘못했을 때 대처하는 방식이다. 무상수리라는 건 그쪽에서 어느 정도 잘못을 인정했든, 고객 서비스 차원이든 애초에 처리해 주기로 책임진 부분이다. 그렇다면 고객인 내가 수리를 맡기고 대여품을 받지 못한 상태로 어느 정도를 기다려야 하는지 대략은 예상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나에겐 상식적인 대응이었다. 적어도 동네 수리센터처럼 최근 접수건이 어느 정도의 주기로 움직이고 있는지 정도의 설명이라도. 


1년도 전부터 있었던 불량이라면 실무선에서 어느 정도의 추세를 파악하고, 일선에서 고객을 담당해야 하는 상담팀에게 어느 정도의 데이터는 제공해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야 아무것도 모르는 상담원들이 앵무새처럼 움직이며 기업의 신뢰성을 떨어트리고, 멀쩡한 고객을 진상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게 아닌가.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구구절절 옳은 소리에 정당한 권리 주장을 해대는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저 지금 우리 사회를 갈라 치기하고 있는 수많은 권리에 대한 주장들 - PC(정치적으로 올바름) 운동과 페미니즘과 장애인 복지와 RGBTQ로 대변되는 성소수자들-과 어딘가 닮아있다는 것 말고는. 아마도 그건 올바른 것, 즉 정의 이전에 우리가 언제나 먼저 앞세워야 할 어떤 태도에 대한 것이라고만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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