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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Jan 13. 2023

어느 날 거울 앞에 혼자 섰을 때

가정 주부 말고 나를 설명할 또다른 이름


가정 주부 말고 다른 단어로 나를 설명할 무언가

조금 촌스러운 제목의 영화 <다시, 뜨겁게 사랑하라 LOVE IS ALL YOU NEED>는 1대 제임스 본드역을 맡았던 피어스 브로스넌이 멋진 중년으로 나오는 영화다. 여자 주인공은 최근 유방암 수술로 한쪽 가슴을 잃은 중년의 여성 '이다'. 그녀는 딸의 결혼식을 얼마 앞두고 우연히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는 바람에 남편과 따로 결혼식이 열리는 이탈리아 작은 마을을 향해 출발하게 된다. 하지만 공항에서 주차를 하다가 사돈 될 '필립(피어스 브로스넌 역)'과 시비가 붙게 되고, 그때부터 이런저런 해프닝을 겪으며 둘의 사랑을 이뤄간다는 이야기.


어찌 보면 '중년의 평범한 여자가 멋진 남자와 만나 로맨스를 이루는 뻔한 러브 스토리일 뿐'이라고 평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과 별개로 그 모든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탈리아 남부의 풍광에 폭 빠져 마지막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를 봤다. 푸른 지중해 바다를 배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엔 빨간 지붕을 얹은 집들이 옹기종이 모여 있고, 절벽을 따라 난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그곳엔 바로 바다로 뛰어들 수 있는 해안 동굴이 이어져 있다. 새신랑 새신부는 오렌지 농장 한가운데에 오랫동안 방치된 시골 저택을 청소하고, 결혼식 하객들이 며칠간 머물 수 있도록 방을 다시 꾸미며 결혼식을 준비한다. 그 모든 장면이 다 예뻤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주인공 이다가 아무도 없는 한적한 바다에서 맨몸으로 수영을 하는 장면이다. 극 중에서 이다는 오로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서만 살아온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자. 하지만 그간 투병 생활에 종지부라도 찍으려는 듯 바다를 보자 가발과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뛰어드는데, 그게 얼마나 자유로워 보이던지! 중년의 민머리와 몸의 곡선투박했지만, 그 자체로 당당해 보여 너무 좋았다 . 또 한 장면은 이다와 필립이 처음 차 안에서 자신의 직업에 대해 통성명할 때였다. 끊임없이 중요한 업무 전화를 처리하느라 바쁜 필립 옆에서 이다는 "그냥 재미없는 미용사예요."라며 자신을 소개한다. 하지만 이내 필립의 옆머리를 곁눈질하는가 싶더니 "위에 숱이 좀 없네요. 옆에도 좀 치셔야겠고..."라고 말하는데, 그 장면이 뜬금없이 맘에 들었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와 별개로 자신의 생계를 위해 할 줄 아는 일이 있었고, 그녀가 스스로에 대해 가정 주부 말고 다른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녀 딴에는 좀 재미없는 직업일지 몰라도, 그렇게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직업이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전업주부로 지내는 동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아이'를 매개한 사람들이었다. 아이의 선생님과 코치 같은 반 학부모와 또 비슷한  또래를 키우는 동네 엄마들... 우리의 관심사는 대부분 아이 양육과 교육에 대한 것이었고, 그 외에 서로의 직업이라거나 취미에 대해 궁금해할 필요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그러니 아들 사춘기를 호되게 치르고 어느 날 나 혼자 거울 앞에 섰을 때. 나는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여행을 하나 가더라도 모두 아이들 취향에 맞춰 갔다. 전시회나 뮤지컬도 모두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것들이었다. 어쩜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이렇게 오로지 하나만 보며 달려왔는지! 아이를 떼고 나자, 내겐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애들도 없는데 굳이 멀리까지 여행을 가야 하나 싶고, 이제 와서 나 좋으라고 비싼 뮤지컬 티켓을 끊는 것도 사치스러웠다. 식탁 위에 올리는 음식만 해도, 애들이나 먹으니 고기도 사고 종류도 바꿔가며 차리지, 나 혼자라면 김과 무말랭이, 된장찌개 하나로도 며칠을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 아이를 떼고 난 내 인생을 생각하자 갑자기 너무 단출해서 홀가분하기도 하고 적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그런 생각을 하며 학원에 앉아 신문 분석 수업을 준비하며 학생 하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달 궤도 진입에 성공한 다누리에 관한 기사 하나를 뽑아 들고서 말이다. 신문기사 뒷면에는 135일 만에 태양과 지구, 달의 중력을 넘나들며 마침내 달 궤도 안에 무사히 안착한 다누리의 여정을 예쁜 8 자 곡선으로 그려 두었다. 우리나라가 왜 다누리를 달을 향해 직선방향으로 날리지 못하고 돌고 도는 스윙바이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태양과 지구 중력이 서로 평형을 이루는 라그랑주 포인트에 대해서도 알려주려고 잔뜩 준비한 채. 그런데 오늘따라 흥분한 모습으로 교실에 들어온 녀석은 다짜고짜 화이트보드에 세계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오대양 육대주를 그리는 폼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대륙의 윤곽이 어느 정도 갖춰지자 나라마다 국기를 그려 넣었다. 근데 중국과 우리나라와 동남아 일대가 일장기로 도배됐다. 의아해서 물어보니 1930년~1945년 당시 지도란다.


이어 인도와 아프리카 대륙엔 유니언 잭과 삼색기가 펄럭이고, 노르망디를 비롯한 유럽 곳곳에 2차 세계대전 주요 격전지가 표시되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된 전술과 무기의 특징에 대해 눈빛을 반짝이며 녀석의 설명이 시작됐다. 녀석은 1,2차 세계대전에 대한 것이라면 모르는 게 없는 전쟁 마니아이자 밀리터리 덕후다. 이렇게 이미 아는 것과 알고 싶은 것으로 충만한 아이들은 그저 질문 하나만 툭 던져도 지식이 줄줄줄 흘러나온다. 가령 녀석을 향해 "근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고 운을 떼면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남미에 숨어 있던 그 나치 전범을 어떻게 잡아 이스라엘 법정에 세웠는지 들려주는 식. 그럼 나는 어떻게 저렇게 똑똑한 녀석이 우리 학원엘 왔을까, 감탄하며 입을 떡 벌며 듣고 있으면 된다.


다행히 오늘은 운이 좋았다. 질문하는 것마다 따박따박 모르는 것 없던 녀석의 말문을 잠시 막을, 근사한 질문 하나를 건진 것이다.  

"근데, OO아. 영국과 프랑스는 저렇게 식민지가 많은 데, 독일은 왜 해외에 식민지가 하나도 없어?"

"....."

지도 위에 유니언 잭과 삼색기를 열심히 채워넣던 녀석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걸 눈치챈 나는 이때다 싶어 다음 시간까지 독일이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를 하나도 갖지 않은 것 1,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는 숙제를 슬쩍 내주었다.  


가르치는 것에 젬병인 나는, 선생과 학생이 따로 없는 이 시간이 너무 재밌다. 비록 내 아이는 갖지 못했던 - 어떤 아이는 무기에, 어떤 아이는 탈 것에, 또 어떤 아이는 고래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이 경탄할 만한 경지에 이른 아이들을! 부지런히 키워 내게 보내준 학부모들께 넙죽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날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가정 주부 말고 다른 이름을 갖지 못했던 나는, 이렇게 서서히 학원 선생이라는 직업에 스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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