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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20. 2023

결혼 패러독스와 타임 패러독스

미혼 친구에게 결혼을 권하지 못하는 이유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다.


모두 강남 중산층의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라 인생의 큰 굴곡 없이 살아온 친구들이다. 다만 그중 하나인 A는 결혼하지 않은 미혼. 낼모레 오십 인 싱글이다. 그러다 보니 친구 B가 '나는 솔로'라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생각났다며 친구 A에게 이제라도 결혼할 생각은 없는지 물었다.


B : 너처럼 아까운 애가 아직 싱글인 게 너무 안타워.

A : 근데 이 나이까지 결혼 안 한 남자 중에 과연 멀쩡한 남자가 있을까?

B : 너처럼 괜찮은데 아직까지 싱글인 남자가 어딘가 남아 있을 거야. 그러니 돌싱이든 사별한 남자든 너무 선 긋지도 말고. 좀더 열심히 찾아보라구.


그러면서 B는 집안 대소사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K- 장녀답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일침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애가 있으면 좀 곤란하긴 하겠지만."


나이 오십에 결혼이라니. 싱글들의 짝짓기 프로그램이 이토록 성행하는 세상이라니. 우리 땐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일들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당연히 연애를 하고 혼기가 차면 결혼을 하고 부부라면 아이 둘 쯤은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20년 만에 이 동방예의지국에 집집마다 모태솔로에, 돌싱에, 황혼 이혼에, 다문화 가 하나쯤 교집합 없는 집이 없게 되었다.


나는 물론 다양성이라면 늘 환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나이에 결혼? 결혼하면 손해라는 정의가 이렇게 배한 시절에 굳이 이제 와서?  


친구 A는 중학교 때부터 거의 평생을 만나온 절친이지만, 내가 결혼하고 그녀가 미혼으로 지내는 20년 동안 그녀를 만나며 나는 한 번도 '나처럼 결혼'을 권하지 않았다. A가 나와 달리 연애의 조건을 너무 깐깐하게 두는 것 같았던 젊은 시절에도, 언뜻 보면 꾸미지 않은 대학생 같은 앳됨이 남아 있던 삼십 후반에도, 어느 순간부터 귀밑머리에 흰머리가 살짝살짝 드러나기 시작한 최근까지도. 나는 A에게 결혼을 권하지 않다. 그녀의 싱글 라이프는 늘 내가 가보지 않은 길이자 인생의 테이프를 돌려 다시 한번 기회가 준다면 선택할 대안적 삶이기도 했기에.


A 또한 마찬가지. 서른 후반에 들어서자 주변 어른들이 명절 때마다 하는 말들 -결혼이 늦는 것을 걱정하는 말들이 하나도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 같이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저 남의 사생활에 대한 얕은 호기심에 '그들'의 걱정을 얹어 건네는 그렇고 그런 잔소리일 뿐. 아마 내가 그때 A에게 나도 만족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그저 습관적으로 권했다면 그녀 역시 내 말이 진심으로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A는 사람의 진심에 대해서라면 아주 예민한 촉을 갖고 있다.


우리는 나의 결혼과 A의 비혼에 대해 늘 이렇게 말했고, 늘 그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

"내가 결혼하려고 해서 결혼이 된게 아니고 네가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결혼이 안된 게 아니듯!"

이제 와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세대를 형성하게 된 나와 나홀로 세대를 형성하게 된 친구의 결정 모두 우리에겐 그냥 자연스러웠을 뿐이다.   


다만 나는 남녀의 결합이란 상당 부분 생물학적 요인에 크게 작용받는다고 생각하는 축이다. 기혼 부부들이 늘 농담 삼아하는 말이 있지 않나. 그때 우리가 제정신이었다면 결혼을 했겠냐는, 눈에 뭐가 씌었으니 비로소 가능했다는. 즉, 젊고 몸이 뜨거울 때니 가능한 결정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결혼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결혼에 대해 말할 때 단골 손님처럼 등장하는 "이 모든 것이 종족 번식을 위한 유전자의 농간이며 우리는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는 말이나, "자식을 낳아 키우기 힘든 세상에서 지금 젊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출산율을 조정하는 것은 진화적으로 너무 당연한 선택"이라는 말 모두 결혼이 생물학적인 요인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너무 잘 설명해 준다. 


그러니 친구  A가 나이 오십에 결혼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런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끌림 없이 사회적 맥락이나 필요에 따라 서로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인데, 젊고 왕성하던 시절에도 안 됐던 것이 이 나이에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오십 평생 자기 만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온 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이라는 제도가 우리에게 드리우는 어쩔 수 없는 자기희생과 불합리와 서로의 밑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이 방식으로 갑자기 몸을 바꾸기 위해서는 굉장히 큰 에너지와 결심이 필요할 것이다. 다이어트를 위해 식단 하나 변경하고 일주일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이 나이에 말이지.


결혼에 대한 나의 이 부정적 정의들은 늘 내가 내 삶을 너무 크게 뒤바꿀 선택을, 너무 철 모를 나이에, 너무 관습적으로 선택했다는 것에 있었다. 그런데, 철들어 가까스로 현명한 선택이 가능한 나이가 되자 이번에는 그 현명함이 다시 결정을 주저하게 만든다는 것. 이것이 내가 말하는 결혼 패러독스다.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아이러니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들은 늘 이렇게 인간의 노력과 최선의 조합에서 살짝 비껴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내가 설혹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결혼을 비틀어 보려 한다고 한들 그 선택은 다시 우리의 시공을 뒤틀어 결국 원래의 운명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는 타임 패러독스처럼. 그러니, 내가 다시 한번 인생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들 나는 다시 결혼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결혼 패러독스와 타임 패러독스. 그래서 나는 여전히 A에게 결혼을 권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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