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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29. 2023

에코이스트, 타인의 반향(echo)으로 사는 사람

가부장제 소극적 여성과 MZ세대 개인주의의 교집합


언니 : 에코이스트라고 들어봤어?

나 : 에코이스트? 에고이스트가 아니고? 

언니 : 에코...였던 것 같은데.

나 : 에이, 에고이스트일걸? 에고가 자아니까. 자기중심적인, 약간 이기적인 사람 말하는 거 아니야?

언니 : 아닌데... 오히려 그 반대 개념이었는데. 너무 남한테 맞춰주고 배려가 지나쳐서 나중에 오히려 탈이 나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더라고. 꼭 나처럼. 




에코이스트(echoist). 토요일에 만난 언니가 던져 준 심리학 용어가 궁금해 웹을 뒤져보니, 작년 이맘때쯤 오은영 박사가 TV(오은영의 금쪽상담소)에서 소개해 널리 알려진 용어였다. 하버드 의대 심리학과 교수 크레이그 맬킨 박사가 만든 단어라는데, 통상 자신의 의견이나 감정 보다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먼저 반응하는 사람을 지칭한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님프 중 하나였다가 저주를 받아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평생 다른 사람의 반향(echo)으로만 발화하는 메아리, 즉 '에코'에서 유래된 말인 듯하다. 


나는 혈액형이나 MBTI 같은 류를 유사과학 정도로 취급하는 사람이다. 혈액형과 별자리와 띠별 운세 같은 건 당연히 웃기는 짬뽕이라고 생각한다. MBTI만 해도 젊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가운데 두 항목, 즉 N(직관형)과 F(감정형)은 S(감각형)과 T(사고형)으로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늘 변화선상에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인간형을 이렇게 몇 가지 항목 안에 가두는 자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근데, 이번 에코이스트 체크 리스트는 달랐다. 대개의 성격이나 심리 테스트 문항은 10개 중 많이 맞아야 3-4가지 정도였는데, 이번 항목만큼은 10개 모두 해당이 됐다. 결정적으로, 이 항목은 나뿐만이 아니라 언니와 엄마라는 가족의 어떤 특성까지 공통적으로 아우르고 있었다. 기질과 어린 시절 양육 환경의 어떤 큰 줄기를 설명하는 것 같달까.  


또다른 컨텐츠인 <어쩌다 어른 3>에 나온 에코이스트 체크 리스트를 내 성격에 덧대어 설명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주목받는 것을 싫어한다 

: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바뀌지 않고 유지해 온 성격이다. 극 I. 칠판 앞에 불려 나가는 것부터 대중 앞에 서는 것은 물론이고, 생일날 축하받는 것조차 싫어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내 생애 마지막이 고독사여도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 


2. 문제가 발생하면 내 탓부터 한다 

: 사춘기 아들과의 갈등을 기록하면서도 내 기조는 '내 아들이 나와 닮아서 힘들다'였다. 어느 정도 문제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 남편의 무관심과 아들의 방종도 다 내가 똑 부러지게 요구하지 않고, 내가 적당한 권위로 아들을 훈계하지 않은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다소 과하게. 그 때문에 한때 많이 우울했다. 


3. 유독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다 

: 자라는 내내 아버지가 자신의 실패를 남 탓으로 돌리는 것(집에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상사가 나쁜 놈이라서, 아들한테 투자하느라)에 치를 떨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면 기본적으로 내 탓부터 하는 편이다. 남에 대한 적당한 평가나 마땅한 비판에도 조금 저어하는 경향이 있다.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나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나와 연루된 인간관계에서(특히 가족) 잘못된 것은 다 내가 좀 더 현명하거나 인내심을 발휘하거나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4.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한다 

: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잘 안 한다. 기본적으로 모든 것은 나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일만 벌인다. 기쁜 일에 크게 '일희'하지 않고 슬픈 일도 '일비' 하지 않는 편. 나에 대한 투자나 도전에도 망설이는 편이다. 혹 실패해서 누군가에게 폐가 될까 봐. 남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고, 남에게 조언을 하지도 않는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건 나이고, 내가 그 사람보다 더 나은 충고나 해결책을 제시할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5. 타인과의 갈등을 회피한다 

: 누군가와 등지는 것 자체가 너무 슬프다. 신혼 때 그런 정서 때문에 남편과 마땅히 싸워야 할 것을 두고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부부는 완벽한 하나여야 하는데 의견이 갈리고, 미워하는 감정이 생기고, 서로의 선택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 날까 보아. 완벽한 화합과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갈등을 해결하는 것보다 부정하는 방식으로 굳어진 듯. 엄마의 성향도 비슷하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이웃과 트러블 상황에서 따져묻지 않고 되려 사과하는 편. 그 깊은 밑바닥에는 가해자가 나중에 앙심을 품고 또다시 보복할지도 모른다는 깊은 불안이 있다. 


6. 생색낼 줄 모른다 

: 사춘기 아들 문제로 처음 상담사인 후배를 찾아갔을 때 후배가 내게 한 조언 중 하나다. 일종의 '자기표현'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매일 똑같은 저녁 식탁이라도 이 음식을 차리기 위해 엄마가 얼마나 수고했으며, 이 음식이 얼마나 맛있고 소중한 것인지 피력하라는 류의 조언을 받았다. 그래야 엄마의 존재와 수고에 대해 남편과 아들이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조언이 나한테는 지금도 가장 어렵다.  


7. 경쟁을 싫어한다 

: 남편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열심히 일하는 가장이지만 아들 학원비까지 벌 만한 능력은 안된다는 걸 깨닫고 몇 년 전부터 알바를 시작했다. 하지만 경단녀가 이전 자신의 커리어를 살려 구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현실에 곧 맞닥뜨렸다. 고작 하루 4시간 알바를 하면서도 온갖 평가와 경쟁에 노출되면서 나 자신 얼마나 스트레스에 취약한 인간인지 알았다. 그래서 내가 아이들에게 성적과 등수를 강조하지 못했다는 것도.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고작 평균치 월급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가장들이 수많은 경쟁에서 매일 분투하고 있는지 감사하는 쪽으로 선회중.  


8. 눈치가 빠르다 

: 예전부터 인간심리와 인간관계의 복잡함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서 상황 파악 능력은 빠른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낮은 자아와 절대적 이상에 대한 동경이 나를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구도에 놓았고, 그 점이 객관적 평가나 인식을 키운 부분이 있다. 다행히 나를 이끈 양질의 책들이 한결같이 '선택과 대가'에 대해 강조한 덕분에 젊은 시절을 지나며 '결정 장애'에 대한 부분도 교정되었다. 지금은 결정 상황에서 꽤 신속하게 내 의견을 내고 상황을 정리하는 편이라, 주변 사람들은 내가 원래 '쿨'한 줄 안다.  


9. 확신이 없는 표현을 사용한다 

: 기본적으로 세상은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한 엔트로피계요, 인간의 자유의지 · 빛의 이중성 · 슈레딩거 고양이의 생사처럼 불확실한 시공간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문명도 다양하게 뻗는 진화의 가지이지, 한 방향으로 진행하는 진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도 나이들며 지혜롭기보다는 후패하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인간은 나이 들수록 서로에게 더욱 친절해져야 한다는 지론!  


10.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나와 타인, 나와 가족, 나와 세계 사이에서 또렷하게 선 긋지 못하고, 늘 경계인으로 살아왔다. 목표를 두고 꼭 무언가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살지도 않았다. 가지지 못해도 너무 안달하지 말고, 성취하지 못해도 너무 좌절하지 않고, 혹 거절 당해도 상처받지 않는 식으로 대비하며 살았다. 그러니 이 나이 먹도록 내 인생에서 정말 좋아하고, 원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여전히 질문중이겠지.




여기까지 쓰다 보며 갑자기 생긴 의문 하나! 바로 에코이스트들이 가진 '문제점'이다. 에코이스트 체크 리스트를 참고하기 위해 두 콘텐츠('오은영의 금쪽상담소'와 '어쩌다 어른 3')를 참고했는데, 그곳에서 제시한 에코이스트의 '문제점'이 참으로 상이했다. '오은영의 금쪽상담소'에서는 이 에코이스트들이 요즘 MZ 세대들의 어떤 독특한 성향을 드러내준다고 하고 있었고, '어쩌다 어른 3'에서는 이들이 극단적 이기주의자들인 나르시시스트들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고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 이 체크리스트를 봤을 때는 나와 어머니 세대를 아우르는 근대 가부장 시대의 소극적인 여성성에 주목했었는데, 내 안의 요소들을 꺼내 설명하다 보니 상당히 많은 부분이 포스트모던 MZ 세대의 개인주의와도 교집합이 그어졌다. 다른 사람의 반향으로 사는 어머니 세대에 대한 반감이 어느 순간 에코이스트들의 개인주의적 요소로 자리 잡은 걸까? 잠시 재밌는 분석이었다.  



나도 MZ세대일까? 다 함께 해보는 ★에코이스트 체크리스트★ |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 17 회https://www.youtube.com/watch?v=x60Nodk_rp0

나르시시스트의 최고의 먹잇감? 남에게 피해주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에코이스트의 특징 |어쩌다어른https://www.youtube.com/watch?v=sfj-uzEpw_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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