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로 만난 또래 친구 중에 내가 정말 신기하게 생각하는 부류가 있다. 바로 자기 생일을 몇 달 전부터 손꼽아 기다리는 여자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생일이 각별했다고 한다. 케이크와 선물과 친구들이 있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시간. 결혼한 이후로는 남편이 그 시간을 모자람 없이 채워주었다. 몇 달 전부터 아내의 선물을 고르고, 아이들과 엄마의 생일파티를 준비하고, 아니면 좋은 여행지를 예약했다. 받는 사람의 기대와 주는 사람의 호의가 합쳐진 완벽한 생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생일은 남편의 뒤통수만 쳐다봐도 진저리 쳐지는 이 나이가 되어도 늘 기다려지는 시간이라고 했다.
정말 신기했다. 사실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생일이 이 정도로 불편하진 않았다. 원래도 주인공이 되는 걸 싫어하지만, 생일이 특별한 기억은 아니어도 부자연스럽진 않았다. 남편 이외에도 나의 생일을 챙겨주는 가족과 친구들은 많았고, 나는 약간 어색해도 그 자리가 사람을 만나는 자리이기에 좋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크면서 원가족 위주로 생일을 챙기는 비중이 늘어나면서 뭔가 불편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 아이들 생일의 경우, 어렸을 때는 일가친척의 축하버무리와 동네 친구들을 초대해 한바탕 치러내면 되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자 점점 아이들은 저들끼리 나가서 생일을 치르게 되었다. 가족끼리의 축하는 밤에 들어와 급하게 생일 케이크만 부는 일이 많아지면서 점차 형식적으로 변해 갔다. 본격적으로 생일이 불편하게 된 건 남편과 내 생일날이다. 늘 주변 어른들이 챙겨주는 엄마 아빠 생일에 수저만 올려놓던 아들들이 이제 부모를 조금씩 의식하게 되면서 생일을 어떻게 기념해야 하는지 잘 모르게 되었다는 것. 주변에선 이런 것도 가르쳐야 하는 거라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굳이 이런 것까지 가르쳐야 하나 싶다.
남편도 나만큼 생일을 불편해하는 사람이다. 자라면서 케이크를 불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헌신적인 어머니는 늘 가족의 생일을 정성 가득 양질의 음식으로 준비했지만, 몸에 안 좋은 크림 케이크를 준비하지는 않으셨다. 우리가 정식으로 연애를 시작할 때, 남편이 나에게 했던 말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말이 하나 있다. 남편은 자신의 약점을 잘 드러내는 사람이 아닌데, 그날 유독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념일을 잘 못 챙겨."
그 얘길 듣고 나는 풋, 하고 웃고야 말았는데, 기념일을 잘 못 챙기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결혼 후 내가 챙긴 남편의 생일 중 제대로 기억나는 것도 딱 한 번뿐이다. 첫 아이를 낳고 맞은 첫 생일. 나는 케이크를 사면서 두께 10센티가 넘는 알록달록한 포장 리본을 하나 더 준비했다. 그리고 이제 갓 3개월이 지난 아기 몸에 리본을 이쁘게 둘러 포장을 했다. 카드에는 이렇게 썼다. "아빠, 생일 축하드려요. 엄마가 아빠에겐 내가 가장 소중한 선물이래요.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30개월 후 둘째가 태어났고, 아이가 하나에서 둘이 되니 내 인생은 세 배로 더 힘들었다. 생일은커녕 나는 남편이 제발 10시 이전에만 들어와 아들 중 하나만이라도 좀 재워주길 바랐다. (링크) 그 후론 더 이상 진심을 담은 생일도 선물도 없었다.
올해 남편의 생일은 설 명절이었다. 남편은 독감이었고, 시댁인 부산까지 내려갔다가 친정인 여주를 들러 오는 여행길은 피곤 그 자체였다. 원래도 생일을 특별하게 챙기지 않았던 나는 이번 생일은 명절을 빌미로 넘어가도 되겠다 싶었다. 뒤늦게 아들과 사위의 생일이 생각난 어머니들이 미안해하며 용돈을 보내고 저녁을 사 먹으라고 하는 와중에도 나는 그 모든 게 번거롭게만 느껴졌다. 이런 내 태도가 못마땅했던지, 친정 엄마가 몇 마디 잔소리를 올리셨다. 그런 줄 알았으면 아까 왔을 때 케이크라도 사다 놓을 걸, 목이 많이 잠겼던데 꿀물이라도 한잔 타내줄 걸, 지금이라도 애들한테 세뱃돈 받은 거 모아서 아빠 생일 축하 해줘.
"엄마, 작년 생일 땐 케이크도 불고 애들 용돈도 걷어서 축하금도 주고 다 했어요. 올해는 이래저래 명절 끼고 했으니 그냥 넘어가도 괜찮아요. 우린 내 생일이라고, 애들 졸업이라고, 평소에도 뭐 특별히 챙기진 않아요. 원래 생일 때 챙겨 받는 거 우리 서로 엄청 어색해 하니, 한번쯤 그냥 넘어가도 돼요."
게다가 남편은 컨디션이 안 좋을수록 입을 닫는 사람. 명절 내내 뭘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하는 방식으로 묵언수행 중이었다. 평상시에도 주변에서 뭐라 조언하는 걸 못 듣는 성질인데, 아플 때 여자들의 해대는 그 많은 '케어'에 가까운 옳은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일종의 방어벽을 시전 중인 것일 수도. 내 경험상으로 그는 그냥 혼자 조용히 동굴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거다. 그러니 내버려 두는 게 상책!
생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좀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는 건 나도 잘 안다. 어렸을 때 나는 이런 기도를 많이 했다. "하나님, 평범하게 살게 해 주세요." 젊은 시절엔 이렇게 바뀌었다. "하나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만 하지 않게 해 주세요." 책에서 본 특별한 위인들이 필연적으로 거쳐 간 고난의 강도 때문일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도 뭐가 그리 불안했는지 도무지 특별한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늘 세상의 주인공이 될 거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란 남편. 늘 무리 속에서 눈에 띄지 않고 무탈하기만을 바라던 나. 이렇게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기념일을 챙기는 방식이라도 비슷하니 지금으로선 그것만으로도 영 다행히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결혼하고 특별히 더 특별해지지 않은 건 아니다. 결혼이란 것 자체가 가장 원초적 인간관계이고, 태생부터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희생 없이 작동하기 불가능한 제도다. 맞벌이를 할 때에도 육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한다면 그건 여자인 나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집안에 들어와서는 밖에서 큰일 하는 남편 수발을 들고 학교 가는 아이들 뒤꽁무니를 늘 따라다니며 살았다. 그렇게 좋아하는 독서모임도 집안일 보다 우선순위일 순 없었다. 밖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분투하는 것을 그만두고 집안으로 들어왔으니, 다른 사람의 보조로서 기능하며 살아야 하는 정도는 마땅한 도리 같았다. 그 모든 생각이 자연스러웠다.
책을 읽고 의식이 깨이면서는 이런 말들을 많이 들었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마땅히 옳은 말이 나이 들면서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생각한 대로 다 살아지도 않거니와 그 생각이란 것 또한 얼마간 남의 생각에 빙의된 것이 많다는 거다. 인스타그램에서 먹고 마시고 여행을 가고 아이 유학을 보내는 그 수많은 눈부신 것들. 그 정도는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인 양, 그것과 비교해서 그렇지 못한 나는 얼마나 뒤처진 사람인지를 매번 재확인시키는 그런 것들. 남들은 당연히 누리는 것 같은 그것, 마치 나도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그것을 남편 잘못 만나, 내가 더 노력하지 않아서, 나는 누리지 못하는 거라고. 매일매일 나를 얼마나 우울하게 했던가.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런 삶에 속지 않는다.
어떤 집에서는 생일을 특별하게 챙기는 게 서로에게 더 불편한 집도 있는 것이다.
첫 아이 돌 때 내가 남편에게 쓴 편지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좋은' 진심을 담을 수 없다. 인생이 그렇게 황금빛이 아니라는 알았는데, '나쁜' 진심을 담아 보낼 순 없지 않은가. 그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 사이에 남은 거대한 단어 중 '사랑'은 좀 부족하지만, 적어도 '신의'는 남아 있다. 사람이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라 늘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것을 선택하며 산다고 생각한다. 남편도 나도 희생적인 사람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유지해 온 방식이 남들이 생각하는 함께 하는 것에 대한 '이상적인 방식'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최적화된 방식일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니, 그런 척하면 더 좋아질 거라는 조언은 이제 사양한다. 척하고 싶지 않고, 인생이 꼭 장밋빛이라는 환상도 거절한다.
허먼 멜빌의 문제적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말투를 빌어 말하자면, 이 정도가 될 수 있겠다.
"이상적인 부부인 척하기보다는 현실은 그리 이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사는 쪽을 선택하겠습니다."
나는 가식으로 점철된 환상보다 현실을 직시하는 내 마음의 정직함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지금으로선 그 어디 즈음에서 인생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생각한 대로 살겠다는 내 다짐의 다른 버전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