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 만원 전철에 실려 다니는 아들은 요즘 헤드폰에 꽂혀 있다. 오늘 아침에 나름 큰맘 먹고 이야기를 꺼낸다.
"아빠, 나 헤드폰이 사고 싶어요."
"사~ 사고 싶으면 사면되지!"
남편은 늘 이런 식이다. 원하는 건 다 할 수 있는데 왜 안 하냐는 식. 누가 들으면 우리가 늘 그렇게 살고 있는 줄 알겠다.
"졸업 선물로 아빠가 하나 사주면 안 돼요?"
"얼만데? 헤드폰도 2만 원에서 200만 원까지 다양하잖아."
"아빠 지난번 피치(우리 집 강아지 이름)가 해먹은 이어폰은 얼마짜리였어?"
"그건 12만 원 짜리였지."
"난 40만 원짜리가 사고 싶어요."
남편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물론 우리도 그런 이어폰을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고성능 이어폰을 산다 해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 그 감도를 다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빠도 그렇게 비싼 건 사지 않는다, 근데 아들인 네가 그런 걸 갖는 게 적당한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렴! 남편은 한 번도 틀린 말을 하는 법이 없다.
아들은 말이 없다. 그저 먹던 아침을 마저 먹는다.
대학을 가진 않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은 주변의 친구들이 졸업선물로 뭔가 받는다는 걸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꽤 고가의 선물을. 그러니 요즘 나름 태어나서 가장 열심히 살고 있는 자신도 뭔가 하나쯤 요구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내가 슬쩍 묻는다.
"그렇게 사고 싶으면 할머니가 주신 돈으로 사. 그런 거 사라고 주신 거잖아."
"그 돈 다 적금 넣고 오가면서 밥 사 먹고 하느라 나 이제 돈 없어. 다시 알바 구할 때까지(아들이 일하던 레스토랑이 지난주 불이 나서 아들은 졸지에 실업자가 됐다) 나 이제 돈 아껴 써야 한단 말이야."
"먹고 다니는 건 엄마 카드 쓰면 되잖아. 지난번부터 엄마 카드 같이 쓰라는 데 왜 안 써? 이제 엄마 돈 안 쓰기로 무슨 작정이라도 한 거야?"
"맨날 돈 없다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엄마 카드를 써?
부모 돈 쓰라는데도 안 쓰는 아들. 이에 대해선 변명이 좀 필요하다. 내가 그동안 자본주의 사회 운운하며 학원비 어쩌고 돈에 대해 꼬치꼬치 질문을 던지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현실 세계에서 돈 개념이 그리 밝은 사람이 아니다. 가격 비교 따위 해본 적 없고, 특등급 스테이크를 사 먹고, 명품은 아니더라도 아들이 신고 싶다고 하면 나이키 신발과 아디다스 츄리닝 정도는 사주며 키웠다. 고2 때까지 영수 학원? 당연히 보냈다. 그러니, 아들의 지금 돈타령은 지나칠 정도로 이상하다. 이런 식이면 나중에 아들은 "우리 집이 그때 등록금 댈 형편이 안 돼서 내가 대학을 포기했잖아"라고 충분히 말할 법할 정도로. 인지편향적이다.
"아들아. 우리 세대야 하고 싶은 거 못하고 해야 할 것만 하고 살았던 세대라 솔직히 너희처럼 40만 원짜리 헤드폰 갖고 싶은 맘 이해 한다면 거짓말이야. 하지만 엄마도 너네 키우면서 교육비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글부글 해봐서 네 마음 충분히 이해 가. 엄마는 나이 이렇게 먹어서 하고 싶은 거 많이 없는데도 이런데, 너는 한창 때니까 얼마나 갖고 싶은 게 많겠니. 그러니, 적금 들던 건 잠깐 쉬어도 돼. 너 다시 알바 구하면 그때부터 다시 넣어도 되고. 또 너 이제 집에서 다니니까 나라에서 격려금 60만 원쯤 나오잖아. 그거 쓰면 되니까 너무 어린 나이에 돈에 얽매이진 않으면 좋겠어."
40만 원짜리 헤드폰이라니. 남편에게도 아들에게도 과소비가 맞다. 헛바람이라도 해도 될 만하다. 아들에게 꼭 필요하거나 합리적인 가격의 물건도 아니다. 남편의 말은 늘 구구절절 옳다. 하지만, 에미들 맘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내 아들이 원하는 걸 해주지 못한다는 사실 앞에, 그게 뭐든 금세 마음이 시큰해진다. 무한 경쟁과 교육열로 점철된 이 황금만능 자본 시대를 살면서 참으로 많은 마음의 부침을 겪었다. 이렇게 어정쩡하게 따라가 봐야 아무런 경쟁력도, 차별화도 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형편에 맞지 않게 사교육에 돈을 쏟아부으며 살았다. 옆집 남편처럼 벌어다 주지 못하는 남편을 탓하고, 여자도 남자처럼 벌게 된 세상에 수완 좋은 옆집 여자들만큼 나가 벌지 못하는 나를 이중으로 탓하며. 중년의 어두운 밤을 더듬어 내가 어떤 사람이었고, 그동안 어떤 페르소나를 쓰고 살았는지도 보았다. 인생의 후반전은 더 이상 자식에 기대어 내 인생을 설계하지 말고 나답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리라 다짐도 했다. 삶에 대한 목적과 철학이 정립되자 자연스럽게 아들에 대한 욕망과 남편에 대한 울분도 사라졌다.
하지만, 아들은 나보다 더 정점에서 이 자본주의 세계를 헤쳐가며 살아야 한다. 돈으로 모든 것이 평가되고 소비로 표현되는 시대를 살고 있었다. 내가 간신히 내 마음 추슬렀다 해서, 아들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오늘 아침 남편과 아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다시 마음이 어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