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딸 하룻밤만 재워줘!

서울 친구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by 쏭마담


"굿모닝~ 오늘 밤에 우리 딸 너네 집에서 자도 되는감? 낼 아침에 일찍 학교에 가야 한대서."


아침에 일어나 보니 서울 친구에게서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그 집 딸은 올해 우리 동네 대학에 입학했는데, 처음엔 다닐 만하다 싶었던 통학거리가 왕복 4시간이 넘어서자 몇 주 만에 적신호가 울린 것이다. 연극영화과 특성상 초저녁에 시작해서 새벽에 마치는 수업도 있다 보니 새벽에 택시 타고 집에 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침 1교시 맞춰 새벽같이 일어나는 딸내미 체력도 말이 아니고! 그러다 보니 내가 올초에 합격 축하 메시지와 함께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고 했다.


"합격 축하해! OO 학교가 우리 집에서 10분 밖에 안 걸리잖아. 술 마시고 차 끊기면 우리 집에 와서 자라 해."


빈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이루어질 줄은 나도 몰랐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동네 친구도 집으로 잘 초대하지 않는 게으른 주부다. 아이들이 크면서 함께 먹는 시간이 들쭉날쭉 해지자 냉장고는 어느 순간 냉동식품과 간편 밀키트로 채워졌고, 집안은 전원주택으로 이사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늘 반쯤 어질러진 노마드 상태. 그러니 실로 오랜만의 손님이어서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부랴부랴 내 방 침대 커버를 벗겨 이불과 함께 세탁기에 돌리고 널브러져 있던 옷가지를 옷장 속에 쑤셔 박고 백만 년 만에 환기를 하고 대청소를 시작했다. 오래 묶은 먼지를 훔치고 묵은 물건들을 정리하다 보니 오호? 왠지 내 마음까지 정화되는 느낌! 하룻밤 땜빵이니까, 뭐. 찜질방에서 자는 것보단 낫지, 하는 심정으로 오랜만에 묵은 떼를 박박 문질렀다. 옷장문만 안 열어보면 된다!


솔직히 말하면, 친구의 딸과 나 사이는 요즘 말로 '어사', 즉 어색한 사이에 가까웠다. 서울 친구와는 1년에 서너 번 주기적으로 만나왔지만, 애들은 어쩌다 뮤지컬 같이 볼 때 먼발치서 인사나 나누던 정도. 물론 애들 초등학교 때 우리는 열흘 정도 한 집에서 먹고 잔 적이 있었다. 제주 한 달 살기가 한창 유행하던 때였는데, 그때 다른 친구네 하나와 세 집이 제주도 오피스텔에서 함께 열흘살기를 했던 거다. 봉고차 한대를 빌려 매일 바닷가로, 오름으로, 박물관으로 돌아다니며 모래성을 쌓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사방치기를 하던 좋은 기억이 있었다. 그러니 그 기억이 우리 사이의 어색함도 단박에 날려주길! 아이들에게도 오랜만이니 함께 치킨이라도 먹자며 미리 언질해 두었다.


늦은 밤. 남편이 친구의 딸을 픽업해 왔다. 누가 보면 아직 여중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앳된 미소를 띤 대학생이 현관에 들어섰다. 하지만 형식적으로 맥주나 한잔 마시고 헤어질 거라 생각했던 우리의 대화는 다음 날 새벽 1시가 넘도록 끊어질 줄 몰랐다. 그저 어색함을 빌미로 시작된 질문은 이내 책을 매개로 안나 카레니나에서 러시아 소설에 대한 서로의 취향으로 이어졌고, 인간을 쉽게 손절하는 개인주의가 어떻게 타자성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철학적 논박으로 마무리됐다.


친구의 딸은 초등학교 졸업 전 학교 도서관의 책을 모두 읽고 나왔다고 했다.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릴 적 아이에게 엄마의 역할이 얼마나 중차대 한지 자각하고 결혼하자마자 일을 그만두고 오롯 육아에만 전념한 케이스. 친구는 책 읽기로 딸아이 한글과 영어를 모두 뗐고, 시간 날 때마다 산과 들과 놀이터로 부지런히 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남편을 꼬드겨 거실의 TV를 없앴고, 핸드폰 없이도 친구들 사이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당당한 아이로 키웠다.


한마디로 고등학교 전까지 사교육과 핸드폰 없이, 전두엽을 마비시킬 요소라곤 일체 없는 디지털 무공해 환경에서 건강하게 자란 아가씨였다. 아들과 좀 싸워보다 제풀에 지쳐 무분별한 핸드폰 사용을 허용하고, 거실에서 TV와 한 몸으로 뒹구는 남편에게 잔소리 한번 해보지 못하고, 이도 저도 아닌 사교육에 반쯤 발을 걸친 채 살던 우리 집과는 완전 차원이 달랐다.


다음 날 아침. 든든하게 아침밥을 챙겨 먹이고 딸아이를 등교시킨 후 잠시 식탁에 앉았는데... 몇 년의 세월과 몇십 년의 나이를 건너뛰고 만난 지난밤이 꿈같았다. 고작 내 아들과 1살 차이 밖에 안나는 딸아이와 이런 질적인 대화가 가능하다니! ㅎㅎㅎ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밤이 매일 계속될 줄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다음 주, 친구에게서 또다시 전화를 받게 되기 전까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