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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07. 2023

그는 여전히 어린 여자를 선호하는 방식으로

남편이 '다른' 의견에 발끈할 때마다



아들 수능 시험을 마치고 난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남편이 물었다.


"난 아직도 걔가 그날 왜 나보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수능 당일날. 아침에 아들을 시험장에 데려다주고 다시 집에 돌아온 남편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다시 아들을 데리러 가기로 했는데, 시험 종료 시간을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아들의 전화를 받은 뒤에야 비로소 집에서 출발했다. 10분 밖에 안 되는 거리다. 하지만 학교 밖은 이미 자식들을 맞이하러 온 부모들로 가득했고, 남편은 30-40분 늦게나 시험장에 도착했다. 아들은 밖에서 30분 가까이 아빠를 기다리다 너무 추워 근처 떡볶이 집엘 들어갔고, 남편이 허겁지겁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막 나온 떡볶이를 먹으려던 찰나였고, 남편이 떡볶이를 싸가지고 나오라고 했을 때 아들은 마저 먹고 갈 테니 아빠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던 거다.  


나 역시 그날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시험이 끝나면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했던 약속이 엎어져 서둘러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들고 들어와 저녁을 차렸다. 기분이 상한 남편은 저녁을 먹지 않았고, 아들은 고기를 구워주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대학도 안 가는데 왜 이렇게 잘해줘?"


그날 저녁에 대해 에미만의 특유의 촉으로 풀어본 썰은 아래와 같다.


"시험은 어렵고, 그 긴 시간 내내 찍고 자는 자신도 못마땅하고, 뒤늦게 후회도 밀려들었겠지. 그래서 시험 마치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을 텐데, 다른 애들 부모는 몇 시간 전부터 정문에서 아들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15분이면 올 줄 알았던 아빠는 30분이 넘게 기다려도 안 오니 나름대로 추위를 피한다고 들어간 떡볶이 집에서 마침 떡볶이는 나오고 배는 고프고 포장해 달라는 말은 못 하겠고... 그래서..."


당신을 버린 거겠지. 아들에겐 그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아빠가 가장 버리기 쉬운 카드였을 것이다. 슬프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다시 아침 식탁에서 갑자기 남편이 물었다.


"수능 점수는 언제 나와?"

"잘 모르는데. 그날 다 찍었다잖아. 형식적으로 본 거여서 나도 별로 신경 안 쓰고 있었어."

"대학 갈 것도 아닌데 시험은 왜 본 거래?"

"애가 말을 안 해. 내 뇌피셜로는 수험증 할인 받으려고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그거 원래 시험 안 봐도 수험증 할인받을 수 있는데 미처 모른 듯. ㅎㅎ"

"허참... 점수 언제 나오는지 알아봐. 점수 나와 봐야 그걸 기준으로 재수를 하던 군대 다녀와서 다시 도전을 하던 할 거 아니야."

"우리 직업훈련받기로 결정했잖아. 선생님한테 학교장 추천서도 받고 내일 배움 카드 발급받아서 직업훈련원에 신청도 다 했는데? 애가 열심히 준비해서 본 시험도 아닌데, 점수가 의미가 있나?"


내가 여기까지 얘기하자 남편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아니, 아빠가 수능 시험 본 아들 점수 좀 알고 싶은 게 그렇게 이상한 거야?"

평소 감정 쓰는 걸 혐오하는 인간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을 때에는 일단 물러나는 게 상책이다.

"알았어. 알아보면 되지. 그게 뭐 대수라고."

나는 얼른 말꼬리를 접고 자리를 피했다. 딱 1절까지만 해야 되는데 2절까지 한 내 잘못이다.


남편도 많이 참았다. 사춘기를 제멋대로 지낸 아들이, 매번 다음 시험부터는 잘하겠다고 하던 아들이, 그래도 대학은 가고 싶다고 하던 아들이, 멋진 역전승은커녕 막상 결승점이 다가오자 꼬리를 내리고 다시 회피한 형국이었다. 그런 아들이 알바만 하고 살겠다더니 다시 프로그래머 과정에 도전해 보겠다고 했을 때, 남편은 자바 스크립트를 하려면 객체지향 정도의 개념은 알고 들어가야 한다며 서점을 들락거렸다. 남편이 100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꺼운 책을 주문했을 때에도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만화책도 안 보는 애가 그걸 보겠니.' 남편은 컴공 출신이다. 하지만 그 세계와 떨어져 살아온 지 30년이다. 그 사이 교재와 교습법 또한 천지개벽했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뒤늦게 아들에게 보이는 관심이 기뻤다.

  

거기까지면 딱 좋았는데, 그런 자신에게 아들이 바람을 맞혔으니 이제 점수라도 까보자는 거다. 그런 자기의 의견에 지지는커녕 반대, 아니 다른 의견을 낸 아내가 못마땅한 거다. 평상시 목소리에 감정 실리는 걸 죽을 만큼 혐오하는 인간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는 건, 뭔가 본질적인 게 건들렸다는 거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뭐 내가 먼저 뭐라 하기라도 했담? 자기가 물어봐서 대답해 준 것뿐인데!




뜬금없지만, 남자들이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 중 내가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가설은 이거다.

 

어린 여자들은 남자의 의견에 반(反) 하지 않는다. 토 달지도 않는다.

뭘 해줘도 좋아하고, 감사한다. 그녀의 긍정은 그 남자의 생각이 옳다는 지지다.


늘 그렇게 살아온 그가 사회에 나가 늘 그렇게 살아온 남자들과 매일 같이 자기 의견이 옳다고 협상 테이블에서 싸운다. 내 의견이 옳고 너의 의견이 그르다고 주장하고, 설득하고, 관철시킨다. 그러니 집안에서라도 자기 의견이 무조건 지지받기를 바라는 마음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늘 경쟁과 실적 앞에 분투하는 너의 삶이 고된 걸 우리도 잘 안다. 그러니! 우리 여자들 잠시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아침 식탁을 치우고 나와, 브런치를 먹으며 남편 뒷담 하는 것도 허용할지어다. 한바탕 우리 집 남자의 불통에 대해 호소하고 나면, 이웃집 남자의 불통이 터쳐나오고, 위아더월드~ 그집 남자도 우리 집 남자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오늘도 하루 더 너를 참고 살게 하니까.


당신도 내 다른 의견에 대해 면대면 받을 자신이 없다면, 내가 이 하얀 백지 위에 쏟아내는 이런 뒷담쯤은 참아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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