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억울한 사람들은 다 교도소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교도소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다 가해자이거늘 가해자들끼리 모이면 서로 자기 신세 한탄을 하기 바쁘다는 거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그 자식이 먼저 나를 도발해서, 어렸을 때부터 불우한 환경에 자라서, 배운 적이 없어서. 그리고 맨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된다는 거지. 세상에 나보다 나쁜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심신 미약과 정상참작이 과해서 가해자들을 위한 나라라는 오명을 쓴 우리나라의 교도소에서조차 이렇게 억울한 사람 투성인 거다.
그때 알았다. 인간은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은 얼마나 강렬한지, 가해자조차 자신을 피해자 코스프레 하게 하는구나. 그 진실이 웃프면서도 몸서리쳐졌다.
최근 떠돌아다니는 갑질 부모들에 대한 영상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배울 만큼 배운 인간들이, 자기 자식에 대해서는 저렇게 지극정성인 인간들이, 이웃에 대해서는 이렇게 아무 상식이 없구나. 모든 사람이 이상하다고 손가락질하는데도, 본인은 너무나 당당했다. 그 똑똑한 인간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데 너무 태연했다. 더욱 놀라운 건, 그들의 신상이 까발려지면 어김없이 그 뒤에 기독교 대학이니 기독교 단체와 회사가 줄줄이 딸려 나온다는 사실이다. 사랑과 희생을 가장 큰 좌우명으로 삼았던 기독교인이 언제부터 이렇게 갑질하는 종교인으로 둔갑했는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세상이 됐는지. 소름이 끼친다.
자연스럽게 3년 전 사건이 소환되었다. 8개월 아이를 입양하여 오랜 기간 학대하고 결국 16개월에 췌장 절단과 장기파열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한 양천구 입양아 학대 사망 사건. 양부모 모두 대표적인 기독교 대학을 졸업하고,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 모두 목사였으며, 남편은 기독교 방송국의 직원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던 시부모도, 그들을 의심했던 이웃도, 그들을 신고했던 아동보호 기관들과 의사도 끝내 아이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아내가 아이를 방치하고, 기분 나쁠 때마다 아이를 던지고, 음식을 제대로 먹이지 않고, 아이의 뼈가 골절되고 멍이 들고 얼굴에 수심이 늘어갈 때까지, 남편이 오직 걱정한 것은 아내의 육아 우울증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납득되지 않는 사실은 이들이 결혼 전 아이를 입양하기로 서로 합의했다는 사실이었다. 자기 딸 영어공부나 신경 쓰고 처진 가슴 수술을 하고 아파트 청약 당첨이나 기다리며 보통의 사람처럼 남편과 알콩달콩한 일상을 SNS에 올리며 평범하게나 살 것이지. 왜 굳이 남의 귀한 생명을 입양해서 사망에 이르게 했을까. 누가 그들에게 자기 주제도 모르면서 다른 이를 구제하라고 했을까. 그들을 그렇게까지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었던 그들의 환경과 마음의 동인에 소름이 끼쳤다.
유신론자인 내가 무신론자인 니체에게 처음 폭 빠졌던 이유는, 그의 생애나 저술에서 적어도 가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는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며 마치 스스로 안티크라이스트인 척했지만, 기실 그는 착한 척, 좋은 인간인 척하는 종교인들이 역겨웠던 것이다. 신의 가장 좋은 점을 취하고, 그것을 후광처럼 온몸에 두른 채, 스스로 신이 된 인간들. 자기보다 낮은 인간을 향해 연민하며, 나는 후진 너희와 다르노라, 나는 너희에게 자비를 베푸노라, 내겐 힘이 있노라. 그렇게 니체는 스스로 좋은 인간인 척하는 바리새인에게 엿을 먹였을 뿐이다. 예수님처럼. 니체도 외식하는 바리새인을 싫어했을 뿐이다. 인간은 모두 스스로 구제할 수 없는 철저한 죄인임을 그는 어쩌면 기독교인보다 더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 억울한 십자가다. 누군가를 위한 나의 욕망이 때로 얼마나 많은 이웃을 죽일 수 있는지 모른 채, 저마다 자기 권리만을 주장하는 가해들이 오늘도 억울해 죽겠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신이 죄 많은 인간들의 죄짐을 짊어지고 가는 세상 억울한 십자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