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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Jun 03. 2024

그 옛날 너를 온통 흔들던 바람이

잠들었던 너를 깨워 다시 파도로 나아가게 할 줄 알았지



10년 전쯤. 부산 송도 해수욕장에 놀러 간 적이 있다. 바닷가에서 5분이면 도착할 만한 거리에 어머니 아는 지인이 내놓은 오피스텔 하나가 비어 있다고... 나갈 때까지 맘껏 사용해도 된다며 어머니께서 "여름휴가를 그곳에서 보낼래?" 하고 물어오셨다. 재밌겠다! 마침 아무 계획이 없던 우리는 주섬주섬 캠핑 장비를 챙겼다. 오피스텔 바닥에 야전 침대와 침낭을 깔고 그곳에서 2박 3일을 보냈다. 캠핑 테이블을 안 가져갔던가? 동네 맛집에서 갓 튀긴 생선가스를 받아와 신문지 위에 펼쳐놓고 피시 앤 칩스처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바닷가까지 가는 길도 좋았다. 주변의 빌딩숲 사이에서 세월을 살짝 비껴 선 채 건물들이 모여 있었다. 옛 건물을 부수고 그 자리에 다시 지어 올린 어중간한 높이의 중년 빌딩. 그런 빌딩들을 따라 경사 진 골목길을 돌아 내려가면 중간중간 작지만 깔끔한 신축 게스트하우스며 작은 카페들이 별처럼 박혀 있었다. 오랜 세월 닳아 미끈해진 돌계단을 다 내려오면 저 멀리 햇빛에 달궈진 노란 백사장 한 조각. 이제 바닷가와 건물 사이. 나무들이 만들어낸 꽤 근사한 그늘이 우거진  공터를 지나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곳 바다 한가운데에 다이빙대가 있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던 다이빙대를 복원하여 재단장한, 거북이 모양을 딴 다이빙대였다. 이제 갓 수영을 배워 물만 보면 물개처럼 뛰어들던 어린 아들들이 그걸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다만, 다이빙대까지 가려면 해변에서 100미터 정도를 자력으로 헤엄쳐 가야 했다. 구명조끼도 튜브도 없이 오로지 맨몸으로. 


첫째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 둘째 아들은 이제 막 1학년. 남편과 나는 수영이 서툴렀기 때문에 아들들을 이끌고 그곳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망설이고 있던 사이. 한 아프리카계로 보이는 젊은 커플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마침 다이빙대로 가려던 참이라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어린 아들 둘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말의 의심도 없이 그들을 따라나섰다. 단단한 몸매에 구릿빛 피부를 한 젊은 커플 뒤를 좇아 작은 손과 발이 힘차게 물살을 휘감았다. 


해변에 서서 어린 아들 둘이 다이빙대에서 신나게 뛰어내리던 모습을 지켜봤다. 3m 높이에서 시작된 다이빙은 점차 높은 곳으로 아들들을 끌어올렸다. 처음 한두 번 뒷걸음질 쳤던 아들은 세 번째부터는 막힘이 없었다. 한여름 햇살보다 더 기운차게 뛰고 또 뛰어내렸다. 그 해 여름. 우연히 발견한 다이빙에서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리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상관없이 물만 보면 뛰어들던 너. 자전거를 타고 어른들을 따라 120킬로가 넘는 하이킹을 억척같이 따라붙던 너. 스케이트보드 위에 올라 숨을 몇 차례 고른 뒤 멋지게 슬라이딩하던 너. 그러던 네가 어쩌다 방에 처박혀 게임만 하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시험은 늘 뒷전으로 미루는 아들이 된 걸까.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든 걸까. 


그런 너를 방 안에서 끌어 내 양양의 어느 근사한 서핑 스폿에 데려갔을 때. 그렇게라도 너를 자연 한가운데 다시 세우면 그 옛날 너를 온통 흔들던 바람과, 차가운 바닷물의 감촉이 너를 다시 일으켜 세울 알았지. 잠들었던 네 몸의 촉수가 잠들었던 너를 깨워 다시 파도로 나아가게 할 줄 알았다. 저 먼 세상을 향해. 그렇게 헤치고 나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 네 몸은 더 작아져 있었다. 마르고 연약한 몸이, 한번 들이마신 소금물에 치를 떨며, 이를 덜덜 떨었다. 파도가 너무 힘들다고, 오돌오돌 밟히는 모래알이 불편하다고, 춥다고 울부짖었다. 집으로 가고 싶다고. 도대체 사춘기를 지나는 시간 동안, 네 몸이 두 뼘쯤 더 커져가는 동안 너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오늘처럼 유독 햇빛이 반짝하고 바람이 적당할 때면, 그날 그 해변이 떠오른다. 모르는 이를 따라,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속으로 성큼 몸을 던지던 너. 힘차게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던 너의 단단한 팔과 다리. 온통 눈부신 가능성으로 빛나던 너의....


이제 프로필 사진 속에서 칼로 벤 날카로운 추억으로 남은, 그 시절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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