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부딪힌 천재들 그리고 그들이 남긴 리더의 초상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로마에서의 행적은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고독한 시기였지만, 그곳에 있는 미완의 그림 한 점[성 히에로니무스]은 그가 남긴 예술적 진심의 파편처럼 빛납니다. 그의 로마에서의 흔적은 회화가 아닌 사유와 실험의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그리지 못한 예술가’였지만, 보이지 않는 구조와 진실을 설계하려던 사유의 리더였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호기심 자체였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로마에서는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장식 등 주요 프로젝트에서 밀려났고, 그에 대한 교황의 신뢰는 미지근했습니다. 1514년, 레오나르도는 로마에 도착하지만 그때는 이미 바티칸을 장악한 세력이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로 옮겨가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늙은 거장’으로 홀로 실험을 계속했지만, 교황 레오 10세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레오 10세는 레오나르도의 과학적 작업을 보고 "이 사람은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겠군"이라고 평가를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레오나르도는 그런 일련의 일들로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조용히 프랑스로 떠나 거기서 생을 마친 게 아닐까요.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빛나던 천재임에도 로마에서는 크게 인정을 못 받은 모습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과 싸운 예술가였습니다. 강렬하고 격렬하며, 타인과 쉽게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비전을 끝까지 실현하는 독종형 리더” 자기 확신과 추진력 고립 속에서도 스스로를 태우는 ‘불꽃형 리더’ 였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 탄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그에게 영원한 무대를 주었고, 그는 그 공간 안에서 신과 인간 사이를 조각해 냈습니다. 그는 말이 아닌 결과로, 명령이 아닌 몰입으로, 고통 속에서 남긴 작품은 2천 년 제국의 상징 위에 예술을 새겼습니다. 그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처음 제안받았을 때 조각가로서 거절했지만, 결국 목디스크, 허리 통증, 분도 등 그 모든 것들을 견디며 4년을 혼자서 신과 인간의 천장 그림을 완성했던 것처럼 그는 그의 천재적 재능을 로마에 새겼습니다.
그의 로마에서의 업적은 대단했습니다. 로마에서 첫 걸작은 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 있는 [피에타]입니다. 젊은 미켈란젤로는 대리석 하나를 깎아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고요한 장면을 조각했습니다. 교황 율리오 2세의 강권으로 시작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작업은 미켈란젤로에게 고통과 고독의 시간이었습니다. 혼자서 천장을 올라 4년 동안 1,100㎡에 달하는 벽화를 그려냈습니다. 또한 시스티나 성당 제단 벽에 그려진 [최후의 심]은 그의 종교적 고민과 예술가로서의 회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집약된 걸작입니다. 교황 바오로 3세의 신뢰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를 총지휘하여 그중 가장 상징적인 부분이 바로 돔(Dome)을 완성했습니다. 이처럼 로마에서 그는 예술가의 천재성을 충분히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의 세 거장은 각자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리더십은 단순히 정답이 있는 하나가 아닙니다. 리더 각자의 리더십이 존재하고 그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그 리더십은 대단한 결과들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3명의 천재가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도 3대 거장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누구도 흉내 내지 않았고, 누구도 타협하지 않았으며 시대를 이끌었지만 서로에게는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여러 작품에서 분명히 느껴지는 세 사람의 느낌이 있습니다. 특히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대단함에 놀라게 됩니다. 그게 로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