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유명한 인격의학자, 폴 투르니에는 '모험으로 사는 인생'에서 인간은 두 가지 본능이 있다고 전제한다. 안전본능과 모험본능이 그것이다. 안전본능은 안전을 추구한다. 위험을 피하고 익숙하고 편안한 걸 원한다. 새로운 건 자연스럽게 멀리한다. 반면에 모험본능은 새로움을 추구한다. 반복되는 것,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경험의 세계에 안주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상반된 두 가지는 또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두려움이다. 사랑은 모험본능과, 두려움은 안전본능과 얼핏 보면 서로 연결되는 것 같다. 하지만 숭고함이나 고결함 같은 가치들은 두 가지 본능에서 찾기 힘들다. 그건 사랑이 갖고 있는 고유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단순히 짜릿함을 즐기거나 해보지 않은 미지로 들어가고자 하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모험의식을 뛰어넘는다. 사랑은 그 이상이다. 난관과 어려움을 뛰어넘어 숭고함을 보여준다.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치는 헌신을 담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위대하다.
우리는 매 순간 사랑이냐 아니면 두려움이냐의 갈림길에 놓인다. 사랑이 위대하다면 두려움은 비겁하다. 두려움은 사랑을 저버리고 사랑이 아닌 이익을 선택하고 그것에 근거해 움직인다. 이득이 될 거라고 보면 덥석 무는 게 두려움의 특징이다. 물론 이득을 얻기 위해 움직일 때 얼마나 손해를 입을 것인가도 함께 생각한다.
두려움이 이득과 손실에 근거해 판단하는 기준을 갖고 있다면, 사랑은 마음에 집중한다. 자신이 품고 있는 사랑에게 집중하며 사랑이 향하는 대상의 마음에 집중한다.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는 계산적 사고를 거부한다. 두려움이 머무름 또는 후퇴와 친구라면 사랑은 전진과 친구이다. 그냥 앞으로 나가는 전진이 아니라 사랑을 이루기 위한 전진이다. 거부와 거절을 각오한 전진이며 자신의 무기력을 증명할 경험도 마다하지 않는 전진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상대에게 했을 때 그게 좋은 영향을 주거나 적어도 상대방이 이를 수용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이게 거부되거나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걸 알게 될 때 상처를 받는다. 이 상처는 두려움을 불러 일으켜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자신을 공격한다. 비난이나 합리화를 통해 받은 상처를 만회하려 하지만 오히려 더 좋지 않은 결과만 얻을 뿐이다. 관계의 손상, 과격한 분노 표현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 합리화를 통한 회피나 책임 전가 전략의 강화 등이 그것이다. 결국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왜곡시켜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득을 최대화시키려는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구조에 빠진다.
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은 나에게로 흘러 상대방에게 스며든다. 사랑은 아무리 거부해도 그 스며듦을 막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지속성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겉으로 드러난 의사표현에 의해 좌절되지 않는다. 사랑은 외면이 아닌 내면을 바라보고 교정이나 수정이 아닌 회복을 핵심 가치로 여긴다. '넌 이걸 고쳐야 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으로 살아가는 삶에 연민을 느낀다. 두려움이 마음을 사로잡아 오직 이득에만 집착하는 삶에 연민을 가진다. 그런 삶을 본질에 가깝도록 회복하고자 다가간다.
사랑이 이득 구조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집중하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구에 흔들리지 않는다. 어떤 일을 열심히 하고도 굳이 그 일을 자랑하지 않음은 일의 목적이 사랑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일로 인해 사람들의 삶이 바뀌고 깨달음을 주고 성장을 향한 동력을 부여해준다면 그것이 보람이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사랑에 근거한 삶은 자연스럽게 약자에게로 향한다. 반면에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이득을 얻을 기회로 눈이 돌아간다. 우리가 둘 중에 무엇을 취하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지금 우리는 두려움을 선택한 자들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는 것에서부터 자살과 온갖 폭력이 들끓는 사회를 경험하고 있는 반면, 사랑을 택한 소수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희망을 품는다. 이런 점에서 난 이 둘을 사랑과 두려움의 패러다임으로 부른다. 삶을 이 패러다임으로 바라보면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