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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이형 Oct 22. 2015

비판적 사고

비판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이야기 하나.

어제 아침에 교육청에서 공문 보낸 거 빨리 해달라고 우리 학교만 안했다고 독촉하는 쪽지가 왔다. 그걸 인지한 때는 이미 유일하게 오전에 비는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실무사에게 부탁했지만 잘 되지 않아 결국 보내지 못했다. 교육청에서는 우리 학교만 빼고 보낸다고 했다. 그 실무사에게 화가 좀 났다.


이야기 둘.

모범공무원을 추천하라는 쪽지가 아침에 왔는데 또 당일이다. 어제 일로 좋지 않은데 연속해서 똑같은 경험을 하다니 더 화가 났다. 그래서 교육청에 전화를 해봤더니 이틀 전에 보냈단다. 알아보니 행정실에서 접수하고 공람처리했다는데 그걸 어찌 알고 처리하겠냐마는 교육청에 난 화가 쏙 들어갔다. 오늘 수업은 오전 한 시간, 오후 한 시간이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추천자 선정하고 문서 작성하고 상훈포털에 입력하는데 시간을 다 썼다. 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추천자가 없는 걸로 알겠다는 내용이 공문에 씌여있어, 실무자의 실수로 추천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마감시한에만 신경썼다. 그러다 보니 교감선생님으로 조사자를 넣어야 하는데 행정실장으로 넣어서 교육청에 제출한 걸 다시 돌려달라고 해서 수정한 후에 다시 제출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이 서류에 한문이 안 들어갔다며 다시 하라고 한 걸 시한이 촉박해서 그냥 결재해달라며 부탁했다. 맘 좋은 교장샘, 그냥 결재해주셔서 교육청에 보냈다. 부장회의를 마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육청에 전화했더니 한자 넣어서 내일 아침에 다시 달라고 한다. 결재 다시 하라고 하는 걸 우겨서 보냈는데 정정 공문 보낼 생각하니 교장샘에게 엄청 죄송스런 마음이다. 내일 아침 교장샘에게 뭐라 말하나 걱정이 들었다. 그런 일로 혼내실 분은 아니지만 죄송한 맘은 여전하다.


나의 경험으로부터 내린 결론. 사람은 상황에 메일 수 밖에 없다. 즉 맥락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물론 주어진 상황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건 개인마다 다르다. 개인이 상황에 맞게 맥락을 만들어간다. 개인화된 맥락을 벗어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갑자기 비판을 꺼내는 건 쌩뚱맞다 싶지만 이것 역시 나의 맥락과 연결된다. 요즘 비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위 두 경험이 이것과 맞아떨어진다.


내 생각엔 비판은 비난이나 반대라기보다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사물이나 현상을 보던 방식과는 다르게 보는 능력이다. 상황에 대한 개인의 해석체계, 즉 개인의 맥락화도 비판이 필요한 부분이다. 비판적 능력을 갖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고정화된 사고방식의 유무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융통성 있게 사고할 수 있느냐고 이는 창의성과도 연결된다.


고정화된 사고는 삶을 단순하게 만들며 패턴화시켜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덜 겪게 하는 장점이 있다. 단순화시키는 것은 우리 뇌가 주로 하는 일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시대가 복잡성을 향해 가고 있다. 무수한 변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 삶에 주는 영향도 점점 크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단순화시키는 뇌의 기능에 마냥 감사할 수만은 없다. 게다가 단순화를 지나쳐 고정화로 간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고정화되어 있는 사고는 일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분노다. 자주 욱하는 사람일수록 고정된 사고에 강하게 묶여 있다. 그런 사람이 발산하는 폭력의 힘은 주변을 공포와 암흑으로 만들어버린다. 그 사람의 부정적 에너지로 인해 관계는 깨지고 평화는 사라진다. 불안과 두려움이 삶을 사로잡으면 삶마저 일그러지고 왜곡되며 부정적인 사람의 시각까지도 내면화하기 쉽다.


그래서 비판이 필요하다.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아마도 유일한 방법은 자기 성찰일 것이다. 자신을 자주 돌아볼수록 고정화된 사고는 깨진다. 내가 왜 그랬지? 이렇게 물어보면 자신의 패턴이 보인다. 그러면 거기에 물음을 제기한다. 이것 말고는 없을까? 타인의 시각과 해석, 맥락이 들어온다. 그렇다고 그걸 다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또 자기만의 맥락을 만들어간다. 그게 고정이 되지 않도록 성찰한다. 완벽한 해답은 없기에 상황에 따라 수정해가는 것이고 상황에 맞게 가장 지혜로운 해법을 터득해가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실수와 실패로부터 배운다. 그게 없다면 비판력은 크지 않는다. 자기 만족에 겨워 고개가 점점 뻣뻣해질 수 있다. 타인의 말을 자신의 경험과 해석으로 무시하고 배척한다. 그런 걸 우리는 거만이나 교만으로 부른다.


그러고 보면 비판은 성찰이고 겸손이다. 역설이다. 반대하고 자기를 내세우기 위한 비판이 아니라 배우고 성장하기 위한 비판이다. 자기의 뚜렷한 목소리를 만들기 위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에서 배울 게 없나 주의깊게 살피는 비판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종류의 비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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