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추억을 담은 향
경쾌한 종소리가 우리를 반겼다. 그녀는 세상 신기한 표정으로 공방을 이리저리 살폈다. 진열대에 가지런히 정리된 오묘한 빛을 내는 병들과 그것들이 뿜어내는 향기에 대한 설렘이 특히 마음에 드는 공방이다. 그녀 또한 그런 듯 보였다.
직원이 나를 발견하곤 오랜만이라며 인사했다. 그가 재빠르게 세팅을 하며 설명이 필요한지에 대해 물었다. 류은은 이미 만들어진 몽환적인 향기에 정신이 팔려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정중히 거절했다. 한동안 그녀가 향기를 충분히 느낄 때까지 기다렸다. 어쩌면 그녀처럼 향기에 혹은 그런 그녀에게 매료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류은은 병에 담긴 향을 모조리 맡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진정이 된 모습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 향기는 기억이 지워져도 기억을 머금고 마음에 남는다고 해요.
향수를 좋아하는 이유를 들은 류은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 저에게선 어떤 향기가 나요?
갑작스러운 그녀의 질문에 돌연 전에 꾸었던 꿈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무그늘 아래 시원한 봄바람. 그렇게 대답했다. 어쩌면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향수를 만드는 법에 대해서 약간의 언질을 해주자 류은은 곧잘 배웠다. 류은이 만드는 향수의 향을 확인하며 직원 또한 탁월하다고 했기에 나름의 재능이 있다고 칭찬했다. 그녀는 부끄러웠는지 귀가 빨개졌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류은은 들리지 않는 척 대꾸 없이 작업에 집중했다.
한 시간가량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집중하느라 그다지 많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녀는 나에게 줄 선물을 만들고 있었다. 말하진 않았지만, 각자의 향이 담긴 향수를 만들어 서로에게 선물했다. 건네고 받아 들 때에 마음이 찌릿한 걸 보니 마음이 통하지 않았나 싶다. 혹은 정전기에 착각했거나.
공방에서 나와 가로등 불빛 아래를 걸었다. 류은은 이제 대화 없이 걷는 시간이 어색하지 않았다. 몇 차례의 데이트 동안 그는 류은에게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모든 대화를 본인이 이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서운함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 또한 그이의 매력이라고 정리해 버렸다. 문득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욕심이 부풀었다.
- 왜 이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까?
항상 지워지지 않는 서글픔을 담고 있는 맑은 눈을 보며 오늘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제껏 그녀가 이렇게 당돌하게 나왔던 적은 처음이었다. 강한 다짐을 한 눈빛을 하곤 손목을 잡으며 술을 마셔달라고 했다. 고작 술 마시는 일에 뭐 그렇게까지 비장해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술에 매우 취약한 나로서는 비장함에 걸맞은 답변을 내어주지는 못했다.
류은은 거절에 여러 질문을 더해 물었다. 그녀의 부탁과 질문은 부탁이나 질문으로 들리지 않았다. 당신과 술을 마시기로 결정했으니 나의 결정에 따라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집과의 거리도 꽤나 멀었으며 류은의 야리야리한 몸은 취한 나를 데리고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힘들어 보였다. 이러한 이유로 거절하자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얌전히 그녀가 포기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만 해도 포기한 줄만 알았다.
- 집에 갈래요?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끊기려면 한참이나 남았지만, 약간의 시간이라도 지체했다가는 꼼짝없이 술을 마셔야만 할 판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헤어질 때마다 짖던 표정과는 정반대였다. 혹여나 질문을 잘못 들었나 싶어 재차 확인했으나 역시나 그럴 리가 없었다. 다만 서로 생각한 의미가 달랐던 모양이다.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자 류은은 고개를 저으며 이내 자신을 가리켰다.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입을 여는 순간 류은이 재빠르게 나의 말문을 막았다. 가는 거 맞죠? 라며 날 향하는 눈빛은 꺾을 수 없다고 직감했다.
그녀의 집은 아담했다. 혼자 살기엔 딱 좋은 크기다. 방과 주방, 화장실이 각각 하나씩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 사는 온기가 짙은 류은의 집은 나의 집과는 달랐다. 항상 서늘하고 고요한 분위기와는 전혀 상반됐다.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 더욱이 사람 사는 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류은의 집이 내심 부러웠다.
멀뚱히 그녀의 집을 구경하고 있자 류은이 다급히 눈을 가렸다. 가려진 눈 뒤로 고조된 목소리가 눈을 감고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순순히 따를 생각이 없어 보이자 곧장 집에서 쫓겨났다. 약 5분가량 시간이 지난 뒤에야 집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 다시 들어간 집에는 침대에 널브러진 옷가지라던가 책상 위에 널려진 작화와 원고지가 정리된 후였다.
류은은 술과 함께 먹을 안주를 내오겠다며 주방으로 사라졌다. 거실에 놓인 식탁 앞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거실에 잉크와 종이 냄새가 은은하게 깔려있었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일을 도와달라는 명목하에 데리고 왔으니 상관없다며 합리화해 버렸다.
책상에 정리되어 있는 원고지에 대사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대사에 첫 장으로 넘겨보았다. 반딧불이. 류은이 처음으로 대화하던 날 그녀가 품고 있던 책의 이름과 같았다.
괜히 훔쳐보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한 번 나쁜 짓을 시작하니 멈추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엔 원고지 밑에 깔린 노트를 꺼내 펼쳤다. 여러 가지 색상이 가지런히 정리된 페이지. 몇 가지의 포스터와 티켓 도안이 그려진 페이지. 극 중 내용 수정 부분에 대한 초안이 적힌 페이지. 그리고...
언제인지 옆으로 다가온 류은이 노트를 덮어버렸다. 다행히 화가 난 기색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류은은 세팅이 다 된 식탁에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궁금해하지 않아도 나중에 다 알게 된다며 서두르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류은의 음식은 생각보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양송이버섯구이의 고소한 버터 냄새는 후각을 사로잡았고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감바스의 탱글탱글한 새우는 침샘을 자극했다.
우리는 와인이 담긴 잔을 가볍게 부딪친 뒤 살짝 흔들어 부케를 발산시켰다. 이후 들이킨 향은 마시지 않아도 취해버릴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은은한 베리 향과 흙 내음은 맛을 보는 것에 더는 뜸 들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슬며시 혀를 감싸며 밀려 들어오는 성혈은 부드러운 산미가 입에 자글자글하게 여운을 남겼다.
글라스 너머로 나를 향한 류은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는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지만, 음식에 대한 평가를 해주기 전까진 입을 열지 않을 모양이었다. 양송이버섯 구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치즈 아래 숨어있던 짭조름한 베이컨과 달짝지근한 통조림 옥수수가 양송이의 싱그러움과 조화를 이뤘다. 입 안의 즐거움이 가시기 전에 바게트를 올리브오일에 찍어 새우와 브로콜리를 올려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기름이 잔뜩 버무려진 탓에 자칫하면 느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마늘과 페페론치노, 후추가 느끼함을 꽉 잡아주었다. 음식을 차례로 맛보고는 그녀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약간 들뜬 모습에 취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음식에 대한 평가가 만족스러웠던 류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두 번째 잔을 부딪치자 류은의 질문이 쏟아졌다. 연애는 해봤느냐라던가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 같은 사소한 질문이었다. 질문이 바닥나고 류은의 말을 듣자 하니 그녀는 내가 과묵한 탓에 나에 대해 숨기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오해가 풀린 그녀의 울먹거리는 표정에서 나온 마지막 질문으로 길고도 짧은 밤이 찾아왔다.
숨소리를 타고 알코올 향이 품 겨온다. 살포시 창문을 끌어안은 암막 커튼 덕에 그녀의 실루엣이 아찔하게 다가온다. 그녀의 두 손이 그녀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로 향했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 빛 번짐이 심해졌다. 그녀의 안경을 나에게 씌워 이제는 실루엣조차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살구나무. 고풍스러운 자태에 한 그루의 살구나무였다. 매혹적인 살구나무의 꽃잎이 살랑살랑 다가온다. 나의 뺨을 부드럽게 스쳐 어깨 위로 올랐다. 꽃잎을 데려온 봄바람이 목을 감싸 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마음속에서 몽글몽글한 느낌이 올라온다.
과육이 입 안으로 달콤한 향기를 퍼뜨린다. 말랑말랑한 과육이 혀끝에 전율을 만들어낸다. 살구가 이토록 달콤했던가. 달콤함에 취해 살구나무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봄바람이 나에게 했던 것처럼. 조만간 움켜쥔 살구 뒤로 박동이 손끝에 느껴진다. 손끝을 타고 흘러들어온 박동에 덩달아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힘에 겨워 베어 문 살구에 뿌리에서부터 실바람이 새어 나왔다. 거세진 바람이 나의 몸뚱이를 덮쳤다. 바람을 타고 온 꽃잎들이 가슴부터 단전까지 훑었다. 그다음, 흘러나온 수액이 단전을 적셨던가.
술기운에 지배당해 몸이 통제를 벗어났다. 잠을 이기지 못해 눈을 뜨기 전까지는 꿈일지도 모른다며 욕망에 대한 자책을 했다.
흐릿하게 보이는 천장은 류은의 안경 덕이었다. 이불속 감촉으로 보아 나체가 분명했다. 그리고 아마 나를 안고 있는 사람은. 류은이 나의 품에서 고요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녀의 온기가 나쁘지 않았다. 실은 기분이 좋다 못해 포근해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