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희극이 보낸 편지 봉투
다시 잠들었던 모양이다. 혼자 남겨진 방에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적막함에 오히려 나체인 상태가 부끄러워졌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옷가지를 주섬주섬 주워 입은 뒤에야 류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양손 가득 빵빵해진 장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장을 보고 온 게 분명했다.
눈을 마주치니 어제의 일에 얼굴이 화끈거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손에 들고 있던 짐을 주방에 내려놓고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 잘 잤어?
어색하게 네-라고 대답하자 나의 볼을 검지로 찌르며 말했다.
- 기억 못 하는 거 아니지?
누가 봐도 의심될 정도로 강하게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이런 너무 과했나? 어쩔 줄 몰라 하자 류은이 피식 웃으며 장바구니가 있는 주방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주방에 있는 동안 방을 가득 채운 냄새에 내심 기대했다. 어제 류은의 요리 솜씨를 본 기억 또한 가세했다.
콩나물이 담뿍 들어간 라면을 자기 그릇에 내어왔다. 라면 괜찮지?라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를 뽐내는 탱글탱글한 면발과 콩나물 위에 올라간 파와 계란이 매끈한 몸매로 유혹해 침샘을 자극했다. 간단한 요리지만, 그에 맞지 않는 잠재력을 자랑해 우리는 순식간에 그릇을 비우는 재주를 부렸다.
류은이 빈 그릇을 치우곤 차와 마카롱을 내어왔다. 찻잔에서 영롱하게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빛깔과 그것이 틔우는 꽃잎에 매료되어 빤히 보고 있자 류은이 입을 열었다. 책상 위에 있던 원고지와 노트에 관한 이야기다.
- 어제 책상 위에 있던 노트 기억나?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입으로 그것에 관해 듣고 싶었다. 류은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 감독님께 연락이 왔어. 반딧불이를 연극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하셨어. 기쁜 마음에 승낙했는데, 전 남자친구에게도 연락을 하셨던 모양이더라고.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알아보고 반딧불이는 전 남자친구와의 합작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류은 이름 옆에 또 다른 저자가 있었다는 기억이 상기되었다. 전 남자친구였구나. 그녀는 이어서 반딧불이를 집필하던 중 생긴 이런저런 마찰에 해어지게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녀의 말투에서 그에 관해 말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맑은 눈동자에 비구름이 늘어나고 있었다. 궁금증을 억누르며 그에 대한 질문들을 무의식의 절벽으로 밀어버렸다. 머릿속에서 질문들을 처형하는 동안 류은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녀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 연락이 왔었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가냘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 물었다. 같이 작업하자고 제의를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후 감독님께도 전화하여 각자의 대본 중에 본인 마음에 드는 대본을 선택하겠노라 하는 답변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전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벗어나자 진정이 되었는지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뒤로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자신의 책이 연극이 된다니 기쁘지만, 대본이 채택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녀가 마음속 이야기를 모조리 털어낼 때까지 얌전히 경청했다. 말의 끝맺음에 이어 작게나마 격려의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 한동안 책방에 못 갈 거 같아. 연극 보러 와 줘. 연락할게.
도리어 씁쓸한 표정으로 작별을 고했다. 류은의 말에 탄식 비슷한 대답이 묘한 감정을 타고 흘러나왔다.
류은은 배웅하기 위해 버스정류장까지 따라 나왔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힘겨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 달이나 류은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답답함을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그동안 그녀가 만들어간 마음속 자리가 작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멀리 버스의 모습이 보이자 두 팔이 나를 끌어안았다.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표정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조심히 그녀를 안아주었다.
버스가 출발한 뒤에도 그녀는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런 그녀에게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류은이 책방에 오지 않기 시작했다. 류은은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녀가 선물한 향수 냄새라던가 소설 속 주인공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다. 책방을 정리하던 중 그녀를 보았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청묘한 날들을 뒤로하고 그녀는 시간이 지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향은 옅어질 대로 옅어져 이제는 실루엣만이 종종 아른거릴 뿐이었다.
또 한 번의 오늘이 시작됐다. 매번 같은 오늘이지만 이번엔 평소와 달리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끈적거리는 울적함이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째깍째깍 달리는 시계, 매력적인 음률을 지저귀는 새들, 부스럭거리며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던 이불까지 평소엔 정겹기만 하던 아이들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울적함에 몸을 일으키기 쉽지 않았던 탓에 평소보다 몇 시간이나 늦게 책방으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책방이 한 치 앞으로 다가와서야 문틈에 끼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편지 한 통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편지에게서 동질감이 느껴졌다.
편지 봉투를 뚫어져라 바라봤지만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보내는 사람 - 류은]...!
류은의 편지였다. 그녀의 이름을 보자 울적함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밀려오는 들뜬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편지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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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픈 눈을 가진 따뜻한 책방 주인에게
오랜만이야. 여전히 책방은 따뜻해?
연극을 준비하는 동안 책방이 너무 그리웠던 거 있지...
찾아갈 여유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준비를 잘 마치고 쉬는 중이야.
그래도 책방은 찾아가지 않기로 했어.
한 번쯤은 당신이 날 찾아와 줬으면 하거든! ㅎㅎ
딱히 보고 싶었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당신은 어땠으려나?
그래도 연락처는 교환해 뒀더라면 좋았을걸.
바쁜 와중에도 목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었을 테니까.
책방 주소를 찾는 수고도 덜어냈을 텐데. 휴...
연극 보러 와달라는 말 기억나?
살구꽃이 지기 시작하는 날
우리 집 근처 지하철역 앞 살구나무 아래서 만나.
류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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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함에 장난스러움이 심심하게 묻어난 말투에 미소를 따라 눈물이 몰려왔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편지 내용을 두어 번 되짚었다. 나는 내가 감정이 이렇게나 풍부함 사람임을 이때까지 알지 못했다. 오랜 시간 찾지 않아 기억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드르륵.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님이 조용히 인사를 건넨다. 평소 같았더라면 단순히 눈만 마주쳤겠지만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인사말에 떨리는 목소리에 놀랐다. 손님도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놀란 표정이 이내 미소로 번졌다.
이후에 책방을 방문한 손님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그들이 인사를 하고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손님 표정이 밝아졌음을 느꼈다. 몇몇 손님은 다음에도 인사해 주세요라던가 밝아 보여서 좋다는 말을 덧붙였다. 기쁨의 전염은 날이 갈수록 거대해졌고 끊기질 않았다. 류은을 만나기로 한 그날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