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살구꽃잎의 홍조
알람 소리가 아침의 고요함을 깨웠다. 책상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온다. 편지와 함께 들어있던 메모다. 애매모호하게 적어놓은 약속 시간과 장소에 불안했던 모양이다.
창문 밖으로 지평선에서 눈치를 보는 해와 눈을 마주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어쩜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는지.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 개인사정으로 인해 금일 임시 휴업합니다 -
책방에 팻말을 걸어놓았다. 들뜬 발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가벼운 마음과는 다르게 역사에서부터 꽤나 애를 먹었다. 처음 타보는 지하철에 으리으리한 역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저기... 저기요! 조심스럽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위해 입을 움직였지만,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는 바람에 한동안 건물 안에서 서성이기를 반복했다. 간신히 찾은 역무원에게 고장 난 기계처럼 질문을 해낸 뒤에 겨우 출발할 수 있게 됐다.
역사를 지하철이 벗어나자 지하철 창으로 황금색의 빛줄기가 눈부시게 반짝였다. 아름다움에 이끌려 바라본 창밖은 나의 눈망울 또한 반짝이게 만들었다.
- 류은 씨도 지하철이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까?
마음에 쏙 드는 풍경에 류은의 생각이 꼬리표처럼 따라왔다. 넋 놓고 감상하다가 역을 지나칠 뻔했다.
역 앞 살구나무 아래서 땅을 신발로 툭툭 건드리고 있으니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건드렸다. 새하얀 긴 팔 티에 청바지 그리고 에코 백을 메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멀뚱히 그녀를 보고 있자 그녀가 정적을 깨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힘차게 걸어가는 그녀의 귀여운 뒷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듬직하게 느껴졌다.
극장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남자는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류은은 그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녀와 그녀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그의 사이를 막아섰다. 뭐 하시는 겁니까? 내가 소리치자 그가 나를 인식해 잡았던 손목을 슬며시 놓고 뒷걸음질 쳤다. 조만간 모습을 감췄다. 그 사람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류은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당황한 표정을 숨기려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류은이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극장 앞에는 그녀가 만든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날아다니는 반딧불이와 반딧불이를 보고 있는 남자의 실루엣 그리고 그의 분위기를 묘하게 만들어주는 남색 바탕에 희고 검은 안개. 류은은 포스터를 가리키며 어떠냐고 물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에 긴장감이 은은하게 담겨있었다. 기대된다는 말을 하자 안도하는 미소로 표 두 장을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연극은 첫 기획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몰입감과 연출이 뛰어났다. 그녀의 손길이 닿은 곳이 대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강하게 느껴졌다. 책에 없던 내용이 추가된 사실도 한몫했다. 서점에서 여자주인공에게 남자주인공이 힘이 되어주는 장면이라든가 향기에 관한 내용에 뿌듯해졌다.
순간순간 반짝이는 눈으로 연극을 보던 그녀의 얼굴이 기억에 맴돈다. 공연이 끝나고도 여운이 남았는지 반짝이는 눈으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는 그녀가 공연장을 나가기 위해 밀려드는 인파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공연장을 벗어나 그녀의 실루엣을 찾아 허우적거렸다.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스쳤다. 류은이 있는 방향으로 인파를 헤집고 나왔다. 시야의 방해가 사라지고 눈에 들어온 류은은 누군가에게 손목을 잡힌 채 끌려가고 있었다. 극장 앞에서 류은의 손목을 낚아챘던 그 사람이 류은의 완강한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끌고 가고 있었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언덕 위로 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은 숨이 차서였을까.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장소는 공연장 근처 건물의 지하였다. 계단 아래의 어둠에 잠시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숨을 골랐다. 차가워진 머리로 계단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긴장한 탓에 물방울 소리를 따라 작은 소리도 거대하게 울리는 느낌이 든다. 귀뚜라미가 재잘대는 소리, 바람이 벽에 스치는 소리, 대화하는 소리까지도.
대화 소리가 새어 나오는 철문 앞에 도달했다. 완전히 닫혀있지 않음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내 마음과는 다르게 녹슨 철문의 접합부가 굉음을 내질렀다. 침입자를 집주인에게 알리려는 듯했지만, 대화하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 듣지 못한 모양이다.
큰 방에 딸린 작은 방. 아마 그들은 그 안에서 대화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소리를 따라 몇 걸음 옮겼다. 한껏 어질러진 방은 그의 생활을 한눈에 보여줬다. 처음 류은의 집에 들어갔을 때와 비슷했다. 다른 점은 분위기 그뿐이었다. 널브러진 옷가지와 어디선가 본 듯한 작화와 익숙한 느낌의 대본. 어디선가...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닫힌 문이 열렸다. 문밖으로 걸어 나오는 남자 뒤로 머리가 헝클어진 채 넘어져 있는 류은이 보였다. 눈물로 젖은 뺨. 그다음 순간 마주친 두 눈. 여전히 적의를 가진 어쩌면 내 탓에 당황이 조금 섞인. 그가 칼을 집어 들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에게 도망가라고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몸을 던졌다. 프레임이 끊겨 보이는 흐릿한 시야에 정신을 차렸을 땐 구멍이 난 배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녀를 찾고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을 부여잡고 물었다.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답을 내어주지는 않는다. 사실은 들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놀라며 망가진 몸에 대한 안위의 질문만을 되돌려줬다.
얼마나 헤맸을까. 계단 아래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서서히 힘이 다해가는 다리를 간신히 들어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끌고 내려간 계단 아래 광경은 나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류은은 축 늘어져 바닥에 누워있었다. 새하얗던 옷이 붉게 물들어간다. 옆에선 경찰이 남자를 제압하고 있었다. 몰려드는 인파를 헤치고 에코 백에서 흘러 널브러진 종잇조각들 사이를 걸었다. 이내 도착한 그녀의 앞에 쓰러져 그녀를 안았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류은은 여전히 따뜻했다. 앞을 가리는 눈물 탓에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뜨거운 물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힘이 다 빠져버린 몸뚱이는 그것마저 허락해주지 않았다.
상처를 덮어주는 살구꽃 잎에 바라본 하늘은 여전히 너무나도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