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르메조

#3 필름 속 가로등 아래

by 덕구

이후에 나날들은 전과 다름없이 흘러갔다. 문에 달린 방울 소리와 책 넘기는 소리 그리고 변함없이 밝게 인사하며 책방을 찾아주는 단골손님들. 여전히 그들에게 인사를 돌려주지는 않았지만 눈을 맞춰 자신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만족을 하는 듯 보였으니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변한 것이 있다면 매일 같이 찾아오던 그녀가 인사말이 아닌 다른 문장을 건넨다는 사실이다. 보통은 꿈이나 구상한 소설에 관한 이야기였다. 책방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의식해서인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이야기를 전달했다. 한 가지 후회하고 있는 건 그녀에게 따뜻하지 못했단 사실이다. 그녀의 말에 고작 무미건조한 단답만을 내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야기를 관리하지 않는 이야기꾼이 된 느낌이다. 그녀가 그런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따뜻한 대답을 해줬더라면 조금 더 밝은 미소를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이 종종 나를 측은하게 만든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요 며칠간 그녀가 책방에 나타나지 않아 나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다린 만큼이나 부드럽게 인사를 받아주지 못한 자신이 문득 안쓰럽게 느껴졌다.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에도 그녀는 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끊겼던 책의 첫 문장 또한 [아버지가 고개를 들라 하니...] 나에게 고개를 들라고 말했다. 올려다본 시점에는 입을 우물우물하며 머뭇거리다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란 표정의 하얀 토끼가 한 마리 서 있었다.


- 할 말 있어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표정에 질문을 던졌을 뿐인데 그녀는 가장 멀리 보이는 책장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의아했다. 이내 책으로 돌아와 금세 그녀의 행동을 잊었다.


책의 마지막 구절을 끝으로 작가의 말을 가볍게 읽으며 아쉬움을 표하고 책을 덮었다. 노을이 책방을 노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손님들은 전부 집으로 돌아간 후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책방 정리를 시작했다. 책방을 정리하는 시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정리를 하다 보면 마음이 간질간질해지는 게 이유이다. 내 나름의 낭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그녀가 쪼그려 앉아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음...? 맙소사 그녀가 카운터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왜 여기서 잠을 자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곧 차가 끊길 시간이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잠을 깨웠다. 잠이 덜 깬 눈을 끔뻑이며 나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 왜 여기...

- 영화 보러 갈래요?


그녀는 상상치도 못한 질문으로 말을 가로챘다. 흰 셔츠를 입고 안경을 삐뚤어지게 쓴 채 배시시 웃는 그녀를 보며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 곧 막차 끊겨요.


그녀는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영화 보러 가요!


곰곰이 생각하고는 책방을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느긋하게 몇 권의 책을 빈자리에 채워 넣는 동안 그녀는 소파에 앉아 얌전히 기다렸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지만, 막차가 떠나가기엔 충분했다.


실은 그녀를 돌려보낼 이런저런 핑계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책방 문을 잠그기가 무섭게 들뜬 모습으로 영화표 두 장을 얼굴에 들이밀었다. 영화표를 받아 들자 핸드폰을 꺼내 들어 무엇인가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그녀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드리웠다.


작은 동네에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동네일지라도 영화관 하나 없으리라 예상치 못했을 터다. 그녀는 문제가 생긴 기계처럼 뚝딱거렸다. 나를 올려다보며 차도 끊겨 집에 갈 수도 없단다. 결국 길 안내는 동네를 꿰고 있는 나의 몫이 되었다.


가장 가까운 길로 걸었으나 1시간이 넘게 걸릴 만큼 먼 거리 탓에 마지막 영화 시작 10분 전에나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부랴부랴 캐러멜 팝콘과 아이스티 두 잔을 구매하여 한 잔을 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영화는 이미 기억 속에서 흐릿해졌다. 아무 영양가 없는 공포 영화에 관한 흥미는 제로였기에 차라리 그녀의 반응이 더욱 흥미로웠다.


밤거리를 걸으며 공포영화를 보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느낌이 좋아서라는 대답을 돌려받았다.


손목시계의 바늘이 4시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집이 멀다며 책방에서 자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CCTV 설치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거리에 훔칠 것 하나 없는 작은 책방이라 잠금장치도 달지 않아 책방에서 밤을 보내기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거절했다. 그녀의 눈은 이미 졸음이 가득했고 당장에 잠을 청할 장소가 필요해 보였다. 이미 풀린 눈에 방을 하나 내어주겠다는 말이 반가웠는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갈 곳이 없는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오랜 시간을 걸었다. 피곤한 탓에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늘은 여느 때보다 어두웠고 달은 아름다웠다. 오늘이 아니면 다신 찾아오지 않을 하늘이다. 차가운 바람이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지 못한다. 비어있던 공간을 채우던 바람이 피부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집에 도착하는 즉시 우리는 씻지도 않은 채 뻗었다. 그녀는 침대, 나는 소파에 몸을 맡겼다. 풀벌레의 자장가가 유독 부드럽게 느껴졌다.


이른 아침 따스한 햇살은 눈을 감고 있음에도 아름다움을 감출 수 없었다. 눈이 부시지 않도록 살구나무가 잎을 이리저리 흔들며 그늘과 시원한 바람을 만들어 준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거친 나무껍질이 부드럽게 느껴진다. 힘든 나날을 버티며 자라났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따뜻해진다.


어디선가 불어온 따뜻한 봄바람이 뺨을 간질인다. 확실히 규칙적으로 불어오는 봄바람은 내 착각이었다. 마냥 기분 좋게 느껴지던 봄바람은 새근새근 내뱉는 숨결이었다. 그녀가 어느새 옆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평온한 얼굴로 잠을 청하고 있는 그녀를 보며 꿈을 되새겼다. 아무래도 꿈에 나온 살구나무는 살구나무가 아닌 듯했다. 나무껍질이 부드러울 리도 없었다.


슬쩍 들춰진 옷자락 사이로 올라간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고 있었다. 그녀가 잠에서 깼더라면 변태 취급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옆에 누워 자고 있던 이유 따위는 대충 얼버무려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천천히 손을 빼고 침실에 널브러진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었다.


습관적으로 바라본 시계는 6시가 살짝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책방을 열기까지 2시간가량 남아있었고 시간은 아직 여유가 있다. 공휴일에는 종종 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면 책방을 열지 않곤 했지만, 딱히 오늘은 할 일도 없으니 책방을 열기로 했다.


보통 아침을 시리얼로 때우곤 했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제저녁부터 공복 상태이기도 하고 손님에게 아침도 주지 않은 채 돌려보내거나 시리얼만 덩그러니 던져 놓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요리하기로 결심했다. 요리라고 해봐야 버터를 발라 살짝 익힌 식빵에 베이컨 몇 조각과 계란프라이를 올린 것이 전부였지만, 시리얼에 비하면 몇 배나 예의를 갖춘 편이다.


음식이 담긴 접시를 식탁에 놓으며 쪽지를 남길 종이와 펜을 찾았다.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는 바람에 손에 들린 종이와 펜은 쓸모가 없게 되었다.


아침인사를 했다. 그녀는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침을 삼키는 그녀에게 아침을 권했다. 식탁으로 자릴 옮긴 그녀의 표정은 반쯤 감은 눈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음식이 들어가자 조금 남아있던 잠도 달아났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식사를 하며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아침을 대접해 줘서 고맙다는 말로 시작해서 오늘도 책방을 열 생각인지에 대해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공휴일이라는 단어를 포함해 되물었다. 공휴일은 내 마음대로 한다고 밝히자 오늘 하루만 자신의 일을 도와줄 수 없는지 물었다. 방금까지 자신의 앞에서 잠을 자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서인지 그녀의 글 스타일을 좋아해서인지 흥미가 생겨 굳이 거절하지는 않기로 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 류은이라고 해요. 제 이름 한 번도 말해준 적 없는 것 같아서요.


마냥 순수해 보이고 화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할 것 같은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류은이 나의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얼굴을 차근차근 살피느라 빤히 바라본 탓이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류은에게 나 또한 이름을 알려주었다. 류은은 연신 나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류은이 도와달라던 일은 단지 연극을 보는 일이었다. 류은은 책이나 영화, 혹은 연극처럼 본인의 일과 관련된 활동을 할 때면 감탄할 만큼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준다. 종종 그 순간만큼은 나의 존재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차례로 인사를 하자 류은은 빼먹지 않고 박수를 쳤다. 극장을 벗어나며 다시 봐도 재미있다는 류은의 말에 그녀를 바라보자 재빠르게 입을 막았다.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 이 연극 오래전에 했던 건데... 다시 보고 싶기도 했고 알려주고 싶었거든요.


말을 마치고 어색해하는 류은에게 분위기를 풀 겸 질문을 던졌다.


- 박수는 왜 쳐요?


류은은 하나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작은 성의라며 쉽지만, 결코 가벼운 행동이 아님을 강조했다. 류은의 말을 듣고 있으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장소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 장소가 그녀의 일에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연극을 보여준 것에 보답을 하고 싶기도 했다.


나란히 걷던 류은에게 이후 계획에 대해 물었다. 혹여나 계획이 있다면 다음으로 미뤄야 할 터였다. 노트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던 그녀가 노트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속으로 조금은 기쁘기도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다음 약속을 기약할 기회는 사라졌지만 미소를 지으며 갈 곳이 있다고 말했다. 류은의 표정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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