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르메조

#2 김 서린 안경

by 덕구

빠르게 달려오던 버스가 비명 같은 기계음을 내지르며 멈췄다. 그녀가 버스에 타길 기다렸다. 새벽에 흘린 눈물에 신경 쓰여 배웅을 나왔다. 책방을 나와서 감사인사를 한 뒤로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안 탈 거요?


운전석에서 기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님의 물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기사님의 중얼거림과 함께 버스가 한숨을 내쉬며 출발했다. 버스가 남긴 먼지바람이 사라질 때까지도 우린 여전히 침묵을 이어가며 자리를 지켰다. 짧지만 길게 느껴지던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그녀였다.


- 우리... 밥 먹으러 갈래요?


오랜 시간 울었던 탓인지 그녀의 목이 잠겨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기 위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붉어진 눈두덩과 귀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손으로 써 내려간 아이에게 사랑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허공을 응시했고 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셀 수 없이 책방을 들락거렸지만 한 번도 얼굴을 본 기억이 없었다. 새삼스럽게 나의 무심함이 느껴졌다.


책방에 담긴 이야기는 책뿐만이 아니다. 책방에 담긴 손님 또한 하나의 이야기다. 나는 이야기를 좋아했고 책방을 열게 됐다. 처음엔 작은 책방의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내가 사랑하는 이야기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당장에 눈앞에 있는 그녀만 해도 그렇다.


동그랗고 큰 눈에 오뚝한 코, 작고 귀여운 입술.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이지만 누구나 그렇다 할 귀여운 얼굴이었다. 문득 손님이라는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물음에 긍정을 표하자 그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직 촉촉한 눈을 끔뻑이며 나를 바라봤다. 아마 대답이 뜻밖이었다거나 아무렇게나 던진 질문에 뒷말을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피해 버스정류장에서 벗어나 길을 따라 걸었다. 조용하게 따라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누룽지 집으로 향했다.


오래된 미닫이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주인 할머니를 불렀다. 주방에서 나오는 할머니를 보며 대충 허리 숙여 인사했다. 나를 본 할머니가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했다. 뒤따라 들어온 그녀를 보고 한껏 상기된 표정을 지은 할머니께서 물었다.


- 저 아가씨는 누구야? 여자친구?


아니라고 부정했다. 흐뭇한 표정을 보니 나의 의사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모양이다. 금방 음식을 내오겠다며 할머니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의 언행에 불편하진 않았는지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 미안해요. 어렸을 적부터 알고 지낸 분인데... 다른 사람이랑 다니는 걸 처음 보셔서 그런 거 같네요.


그녀는 목을 풀기 위해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 삑사리를 내며 괜찮다고 말했다. 다시 침묵이 이어질 듯싶은 분위기에 그녀가 감사인사를 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줘 고맙다는 인사였다.


반복되는 감사와 사과에 그것들이 단지 그녀가 많이 혼란스러운 상태로 정의해 버리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애써 서툰 미소를 지어 보였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왔다. 종이컵에 물을 따라 내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종이컵을 비웠다. 밤새 눈물을 흘리느라 목이 마른 상태였지 않나 싶다. 생각보다 물이 차가웠던 탓에 양손 모두 주먹을 꽉 쥐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돌솥에 나무 뚜껑을 덮은 누룽지가 펄펄 끓으며 상에 놓였다. 김치와 김이 담긴 그릇을 놓아주며 나를 향해 평생 해본 적도 없는 윙크를 날리며 할머니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의 윙크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녀가 나무 뚜껑을 열고 김이 서린 안경을 닦고 있었다. 돌솥에선 구수한 누룽지의 향과 수증기가 한가득 피어올랐다. 숟가락을 집어 들어 숭늉을 한 숟가락 조심히 입안에 흘려보냈다. 마음 한 편의 그리움을 따뜻함으로 채워주는 맛은 언제 먹어도 기분을 상기시켜 준다.


우린 서로의 비워진 그릇을 확인하기 전까지 단 한 마디도 없이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녀는 뜨거운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호호 불어먹느라 내가 그릇을 비우고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그릇을 비웠다.


- 어렸을 적 슬픈 일이 있거니 입맛이 없어 보일 때면 여기 와서 끓인 누룽지를 먹었어요. 그게 생각이 나서...

막무가내로 데려온 식당에 혹여나 입맛에 맞지 않았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어 혀가 멋대로 변명을 하며 춤을 췄다.


- 맛있었어요.


아직 부기가 덜 빠진 눈으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뺨에는 여전히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지만 한결 나아진 표정에 안도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에 앉아 재료를 손질하는 할머니에게 다가가 계산을 부탁드리며 카드를 내밀었다. 할머니는 그녀의 손에 들린 카드를 밀어내며 돈은 나중에 남자친구한테 받을게 라며 나를 바라보며 어서 여자친구를 데리고 가라는 말과 함께 손짓했다. 적잖이 당황한 그녀가 나를 뒤돌아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녈 봐서라도 어서 식당에서 나가야만 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짧은 인사를 드리고 식당을 나왔다. 여전히 느껴지는 할머니의 흐뭇한 시선을 받으며 그녀와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 좋으신 분이네요.


그녀의 말에 수긍했다. 분명 할머니는 좋은 사람이었다.


- 고등학생 시절 방황하던 제게 아무런 대가 없이 매일같이 밥을 해주시던 분이에요.


그녀가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는 줄만 알았다.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전까진 그랬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할머니에 이야기가 아니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말에 당황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새벽에 들은 이야기도 마음에 걸렸다. 가까운 친구라도 있었다면 진즉에 떠벌렸을 탓이다.


- 감사합니다.


나름의 최선의 답을 내놓았다. 기다렸는지 틈이 생기자마자 그녀와 나 사이에 침묵이 끼어들었다. 긴 침묵 끝에 버스가 요란하게 그녀를 태우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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