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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쩌리짱 Jan 01. 2021

새해 첫날의 문장백과대사전과 루바이야트


내 팔뚝보다도 더 두꺼운 이어령의 금성판 <문장백과대사전>(1988)을 구입했다(절판이어서 중고판으로). <미생> 윤태호 작가 인터뷰를 보니까, 습작생 시절에 청계천 헌책방에서 <영화의 이해>를 사서 작법을 배우고(만화 작법론이 없던 시절이라), <문장백과대사전> 등을 사서 “평범한 말을 낯설게 조합해” 대사 쓰는 법을 공부했다고 해서. 나는 윤태호 작가 웹툰의 그 군더더기 없이 압축되어서 뜻을 자꾸 곱씹게 만드는 대사가 정말 좋다. 검색해보니까 강원국 작가도 <문장백과대사전>을 ‘인생의 책’으로 꼽았더라고.


금성판 <문장백과대사전>(이어령)의 위엄


<문장백과대사전>은 옛날 책답게 마지막 페이지에 당시 가격(1988년) 6만원 딱지가 붙어 있는데, 대체 얼마나 고가의 책이었던 거지. 지금의 눈으로 봐도 그 가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한 거인의 방대한 지식과 총명함을 한 권에 다 쓸어 담아내겠다는, ‘정확하고 실감나게’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명언구와 고사, 일화 등을 적재적소에 빌려 쓸 수 있도록 하겠다는 욕망을 제대로 구현해버린 책이다. 기가 질리게 굉장하고 존경스럽고 감사하다. 덕분에 잘 보고 많은 표현들을 적절한 위치에 옮겨보겠습니다, 꾸벅. 


머리말부터 이어령 작가의 멋진 표현들이 그득한데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사람들은 시체안치소 같은 낱말풀이의 사전이 아니라 피와 열기가 있는,
그러니까 우리가 생활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들이
꽃밭처럼 싱싱하게 살아 있는 색다른 또 하나의 사전을 필요로 하게 된다. (중략)

그래서 책 속에 사장되어 있는 지식을 바깥으로 끌어내어
공기처럼 만인이 호흡할 수 있는 한 권의 도서관 같은 책,
수많은 꽃을 찾아다니며 꿀의 그 에센스만 따 모은 벌통 같은 책,
그런 사전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이 문장대백과사전이다. 

                                          - 이어령 <문장백과대사전> 중에서



한 권의 도서관 같고, 꿀의 에센스만 따 모은 벌통 같은 책을 혼자서 쓰겠다는 기획과 실천이라니. 글 쓰는 사람들이 얌전히 앉아서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릴 때 실은 그 안에서 홀로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린 뒤 깜짝 놀랄 전쟁을 치르는지, 알면 알수록 그 방대함과 치밀함에 감탄하게 된다.  


새해 첫날이니만큼 내친김에 <문장백과대사전>에서 ‘새해’도 찾아봤다. ‘어록’ ‘시.묘사’ ‘격언.속담’ ‘어휘.명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 어록이다. 


새해는 묵은 욕망들을 소생시키고,
고독하고 사려 깊은 영혼이 물러가는 해. 

                                              - 오마르 하이얌 <루바이야트> 중에서



다이어트나 운동, 연애처럼 새해면 꺼내드는 묵은 욕망들이 과연, 연말 즈음에나 고개를 드는 고독하고 사려 깊은 생각들(가령 이웃 생각)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일까, 처음으로 고개를 가웃거려보았다. 사실 평범한 우리네 삶에 있어선 둘 다 진짜 중요하지, 우위를 가릴 수 없을 것 같다.


오마르 하이얌은 페르시아의 수학자, 천문학자이자 시인으로 그가 쓴 4행시집이 바로 <루바이야트>다. 루바이야트는 말 그대로 4행시라는 뜻의 페르시아어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무신론적 색채가 짙게 나타나 있고,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지 않는 현세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져 있다’고. 오,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지 않는 현세주의라니 멋지다. 나는 올해 루바이야트처럼 짧고 굵게 현세주의적 삶을 살겠다!고 다짐해본다.


안녕, 2021년. 우리 잘 지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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