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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쩌리짱 Oct 13. 2016

드라마를 보며
눈물 콧물 훔친 밤

<중쇄를 찍자!>가 내게 남긴 것

   

드라마는 잘 안 보지만, 한번 보기 시작하면 단숨에 시리즈를 돌파해버린다. 최근에는 사나흘 밤을 밝혀 <디어 마이 프렌즈>와 <굿 와이프>를 끝냈다.  


재미있다고 소문 난 드라마는 역시 처음부터 몰입이 잘 된다. 지루한 장면이 있으면 스킵을 해가면서 빠르게 지나간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한 시기에 압축적으로 겪는 주인공들이 줄곧 울고불고 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 상냥한 위로를 건네는 모습이 보기 좋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인연을 끊는 대신, 오랫동안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 거기에 있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지치지 않고 미워하며,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소년처럼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토록 뜨거운 감정을 견디고 유지하는 것도 재능,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서로를 붙들어 매는 것도 재능. 나는 그들의 재능을 한없이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잠깐 동안은 나도 조인성과 연애하는 고현정이 되고, 윤계상, 유지태와 삼각관계를 이룬 전도연도 되었다가 바비 인형 몸매의 나나가 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드라마는 곧 끝이 나고, 일상은 한층 더 무료해져 버린다.          


  

1

간밤엔 일드 <중쇄를 찍자!> 4화부터 8화까지 연달아 봤다. 두 달 전에 3화까지 보고, 이건 재미있으니까 아껴 봐야지 하고 계속 아껴온 참이었다. 만화잡지 편집부가 배경이라 편집자와 만화가, 만화가 지망생들의 웃기고 애달픈 사연들이 주로 나오는 코믹 드라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분명 두 달 전엔 킥킥대며 봤던 것 같은데, 어젯밤엔 매 화마다 크리넥스를 낭비해가며 펑펑 울고 말았다. 


특히 눈물 콧물을 쏟았던 대목은 7화, 누마타의 에피소드였다. 누마타는 유명한 만화가의 10년차 고참 문하생이다. 스무 살에 신인상을 받았지만 마흔이 되도록 프로 데뷔를 하지 못했다. 스승에게는 계속 콘티 단계에서 지적을 받고, 잡지 편집자에게는 자신의 스토리를 이해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기가 죽은 누마타는 자기 작품을 한 편도 완성하지 못했고, 늘 콘티 단계에서 멈춰서 버렸다. 


만약 끝까지 밀어붙여 작품들을 완성했더라면 자신에게 맞는 편집자를 찾아내 승부를 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에게 남은 건 수십 권의 콘티 노트뿐이다. 


그러다 개성과 재능이 뛰어나 스승에게 인정을 받는 신참 문하생 나카타를 보면서 누마타는 질투를 느끼고 결국 낙향을 결정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나카타가 누마타의 콘티를 이해하고 좋아해준 유일한 사람이라는 거다.

 

화실을 떠나는 누마타에게 나카타가 묻는다. 


왜 돌아가는 거예요?
그 콘티 완성시켜야죠.



 누마타는 이렇게 답한다.

 그릴 거였다면 진작 그렸겠지.
아니 그렸어야 했겠지.


이 대사가 내게는 그렇게 슬프고 아프게 다가왔다. 스무 해 동안 제대로 싸워보지도, 부딪혀보지도 못한 채 자신은 그저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누마타의 고백이 나를 울렸다. 20년 만에 마침내 자신과 마주한 남자의 용기를 지켜볼 수 있어서 좋았다. 


퉁퉁 부은 눈을 껌뻑이며 누마타와 나카타의 차이를 거듭 생각해본다. 프로 작가로 살아가는 사람과 평생 지망생인 사람은 결정적으로 무엇이 다를까에 대해. 왜, 어째서 누마타는 프로 만화가가 되기 위한 마지막 한 발을 내딛지 못했을까? 무려 20년간 그를 가로막았던 심리적 장벽의 정체는 무엇일까.


영어 표현으로는 writer’s block이라고 하는 ‘작가의 장벽’. 누마타는 그 괴물 같은 장벽을 깨부수지도 포기하지도 못했던 20년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릴 거였다면 진작 그렸겠지”는 자포자기가 아니라 오랫동안 현실을 외면했던 대가로 고통 받았던 자신의 대한 인정과 수용의 말로 들렸다. 그는 주위의 평에 휩쓸렸고 자신을 좀 더 믿지 못했다. 누마타는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만화가가 되고 싶었고, 나카타는 오직 자신만이 그릴 수 있고 그리고 싶은 만화를 그릴뿐이다.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창작 욕구과 인정 욕구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재능, 

두 사람의 차이란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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