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서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를 쏠쏠히 느끼고 있다. 새롭게 알게 된 것에는 성격이나 재능에 대한 것들도 있는데 대다수는 취향에 관한 것이다. '아 나는 이런 느낌의 음악을 좋아하는구나, 이런 류의 향기를 좋아하는구나' 같은. 취향이 견고 해지는 것은 '나다워져 가는 듯한' 느낌이라서 취향에 대해 알아갈수록 나만의 색을 찾아가는 뿌듯함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취향이 단단한 사람이 멋있게 느껴진다. 취향이란 많은 것에 대한 경험과 자신과의 대화 끝에서야 비로소 하나씩 찾게 되는 것이니까. 단순히 외골수처럼 자신의 생각 안에 갇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고 그것을 풍성하게 음미하며 사는 사람들이 인생을 온전히 누리는 존재처럼 보인다.
새로이 누군가를 알게 되면 그 사람 대해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대체로 취향에 관한 것일 때가 많다.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무슨 음식을 즐겨 먹는지,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질 때 무엇을 즐겨하는지. 낯선 이의 고유한 공간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그 생경한 느낌은 취향이라는 미지의 공간을 처음 발견한 탐험가가 된 듯한 설렘을 가져다준다.
취향을 탐색하는 과정 속에서 그 사람과의 심적인 거리가 가까워기도 되려 멀어지기도 한다. 혹여 나와 비슷한 취향을 발견하면 마치 영혼의 단짝을 찾은 듯 반갑고, 전혀 몰랐던 새로운 분야의 취향을 알게 되면 전에 없던 신기함과 호기심이 솟아난다. 그래서 '취향'은 나와의 관계에서도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여러모로 큰 의미를 가진다. 이번 글에서는 나의 취향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1. 사람 취향
내가 어떤 부류의 사람을 좋아하는지 한참 고민해봤다. 주로 센스와 위트가 있고 눈치가 빠른 사람에게 마음이 가는데 그가 그 눈치를 활용해 자신의 이익을 찾지 않고 상대방을 살피며 배려할 때 매력적으로 보인다. 너무 완벽하고 깐깐한 사람보다는 빈틈 있고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 좋다. 좀 실수도 할 줄 알고, 그럴 수도 있지 허허하고 웃어넘길 줄 알아야 함께하는 것이 편하고 즐겁다.
나는 굉장히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사람이라서 관계에 있어서 적극적이다. 그래서 흔히들 내 곁엔 왁자지껄하고 말이 많은 사람들이 많을 거라 추측한다. 그러나 의외로 주변엔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들이 많다. 주로 내가 떠들고 쫑알대면 그들이 따뜻하게 웃으며 들어주는 편이다. MBTI로 보았을 때 INFP나 INFJ가 나와 찰떡이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나를 챙겨주는 이들과 나는 조용히 깊어진다.
2. 이성 취향
연애 7년 & 결혼 4년 차다 보니 이상형을 그려보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러나 만일 내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미안해 여보) 성품이 온화하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을 찾을 것 같다. 나의 급하고 방방 뛰는 성격을 받아 줄 넓은 아량을 가진 사람. 결혼 후 추가된 핵심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개그 코드가 잘 맞는 것이다. 결혼을 해보니 쓸데없는 헛소리를 늘여놓으면서도 서로 배 잡고 깔깔거리며 자지러지게 웃을 수 있는 것이 삭막한 인생살이를 살아가는데 생각보다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외형적인 부분만을 생각한다면 일단 키가 크고 몸통이 두꺼웠으면 좋겠다. 덩치가 좋고 손도 발도 큼직큼직해서 보통 여자에 비해 다소 건장한 내가 상대적으로 자그맣고 야리야리해 보일 수 있으면 좋겠다. (슬프게도 내가 작아질 수 없으니 상대가 커져야 한다) 뭣보다 인상이 서글서글하고 웃는 게 이뻤으면 좋겠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추신수나 최자인 걸 보니 나이가 들고 있나 보다.
3. 활동 취향
지금껏 즐겨해 온 활동들을 돌아보면 사람과 함께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뮤지컬, 밴드, 살롱 모임. 내가 한 번이라도 푹 빠져서 했던 활동들은 모두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들이었다. 집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음식을 해서 먹이거나, 어딘가에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다. 무얼 하든지 간에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들은 내게 좋은 기운과 에너지를 불어넣어 준다.
그렇다고 해서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진 않는다. 혼자서 걷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들 또한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활동들이다. 다만 그 모든 활동들을 '따로 또 같이'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카페에 나란히 앉아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이따금씩 무언가가 떠오르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자기에게 집중하는 시간들을 사랑한다.
4. 여행 취향
여행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과정부터가 내게는 여행이다. 가게 될 여행지에 대해 알아보고, 교통편과 숙소, 투어들을 예약하다 보면 그곳에 미리 살짝 다녀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가기 전에 많은 것을 계획하고 준비하지만 막상 여행지에 가서는 계획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여러 가지 선택지들을 미리 만들어두고 그곳에서 그날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결정하고 실행하는 맛이랄까.
관광과 맛집 탐방보다는 대자연과 액티비티에 흥미를 느낀다. 남들이 다가는 곳 혹은 만들어진 인위적인 장소보다는 남들은 모르는 곳과 태초부터 존재했던 자연이 내겐 더 매력적이다. 유명한 여행지 어딘가에서 나 같지 않게 찍힌 근사한 사진보단, 그곳에서 만난 인연들과 찍은 자연스러운 사진이 더 좋다. 그래서 여행을 다녀온 내 사진첩엔 나의 시선으로 담은 풍경과 여행자들의 얼굴 만이 가득하다.
5. 덕질 취향
하나에 꽂히면 미친 듯이 파고드는 성격인지라 살면서 무언가에 깊이 빠져든 적이 몇 번 있다. 노래가 그랬고, 뮤지컬이 그랬으며, 언젠가는 사진이었고, 마지막이 여행이었다. 20살에 시작한 밴드는 벌써 10년이 넘게 이어가고 있고, 20대 중반엔 뮤지컬에 빠져 학교를 쉬면서까지 뮤지컬팀에 들어갔다. 사진에 빠졌을 때는 사진 수업을 수강하며 DSLR을 끼고 온천지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20대 후반엔 무모하리만큼 용감하게 배낭여행을 다녔다.
돌이켜보면 저마다의 것에 빠져든 이유가 있었다. 공연을 통해 남들 앞에서 나를 보여주는 게 좋았고, 목소리와 몸짓으로 나만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좋았다. 사진을 통해 찰나의 순간을 잡아두는 것도 좋았고 나만의 시선으로 피사체가 된 세상을 기록하고 싶었다. 여행은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새로운 상황 속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 세상을 접하며 나를 알아가는 시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 지금도 누군가 나에게 무엇을 가장 사랑하냐 물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여행을 꼽는다.
6. 영화 취향
어려서 보았던 할리우드 영화 때문인지 생뚱맞게도 블록버스터급의 재난 영화를 좋아한다.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과 토네이도가 몰아치고. 좀비 떼가 습격해서 이 지구가 종말 하는 시나리오를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두근거린다(?). 모두가 함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결속력과 인류애가 폭발하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뭉클하다 못해 가슴이 벅차오른다. 내 삶이 스펙타클한 위기에 연속이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 말미에 모두가 행복을 되찾는 결말은 내게 큰 위안을 가져다준다.
7. 영상 취향(유튜브 알고리즘)
그러고 보니 유튜브를 보지 않은지 꽤나 오래되었다. 예전엔 여유로울 때마다 등을 붙이고 누워 몇 시간이고 유튜브를 보며 딩굴대곤 했는데, 어느 날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을 따라 온갖 잡영상을 홀린 듯 보고 있는 내 모습에 현타가 왔다. 그렇게 소비되는(아니 정확히 말하면 허비되는) 소모적인 시간들이 아깝게 느껴진 뒤로 눕튜브를 끊고 영상을 보지 않게 됐다. 가끔 노래를 틀어놓을 용으로 사용하거나 심신의 안정을 위해 개나 고양이 영상을 보는 것이 전부다.
8. 음악 취향(뮤직 플레이리스트)
음악 취향이라 하니 무언가 대단히 있어 보이는 걸 읊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알고 있는 음악 자체의 폭이 몹시 좁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노래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유명해서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그 취향이 변했다는 것뿐이다. 예전에는 웅장하고 극적이고 클라이맥스가 확실한 노래를 좋아했다면, 지금은 특별한 음색에 편안히 들을 수 있는 잔잔한 음악이 더 끌린다.
특별히 최애 장르라 내세울 만큼 그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본능적으로 재즈와 블루스 풍의 음악이 좋다. 이것은 20대부터 지금까지 유지해 온 몇 안 되는 한결같은 취향인데, 굳이 이유를 꼽자면 재즈가 주는 늘어지고 나른한 느낌이 좋아서이다. 그냥 좀 풀어지고 싶을 때, 혹은 왠지 취하고픈 밤에, 여행지에서 찾는 바에서 들려오는 재즈 소리를 생각하면 크.. 생각만 해도 참 좋다.
9. 음식 취향 (소울푸드)
고기라면 사족을 못쓰는 자타공인 육식주의자지만 사실 고기 향이 베여있는 야채를 좋아하기에 선택적 채식주의자에 가깝다. 제육볶음에 들어있는 양파, 찜닭에 들어있는 감자와 당면, 고기 옆에서 같이 구워진 버섯과 아스파라거스를 고기보다 더 사랑한다. 코가 예민한 탓에 향신료가 들어있거나 특유의 냄새가 강한 것 못 먹는다. 동남아를 여행할 때 고수가 들지 않은 것을, 미국을 여행할 땐 누린내가 안나는 고기를 찾았다. 지치고 힘들 때나 화가 날 때, 이유 없이 기분이 울적할 때는 떡볶이를 찾는다. 매콤하고 쫀득한 떡볶이 한 줄기면 모든 스트레스를 다 날릴 수 있다. 변함없는 나의 소울푸드는 우주유일 떡볶이다.
10. 향기 취향(냄새 혹은 향기)
코가 예민한 편이라 누군가의 느낌이나 특정 장소를 체취 혹은 냄새로 기억하곤 한다. 그 사람이 뿌린 향수나 섬유유연제 향기로 그 사람의 첫인상을 정하기도 하고, 뭔가 좋은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오면 근거 없이 그 사람이 근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정 여행지를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보다는 비행기에서 내려 처음으로 공항 밖으로 나설 때의 특유의 냄새 혹은 그곳을 여행하며 맡았던 향기들이 먼저 떠오른다.
향을 중요하게 생각하다 보니 스킨로션이나 핸드크림, 바디워시와 샴푸까지 대부분의 제품을 고르는 기준이 향기 일 때가 많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찾게 된 나의 취향은 머스크와 파우더, 코튼 향이다. 누군가는 그 향을 세제 냄새 혹은 모기퇴치제 향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나는 잘 빨아서 햇볕에 빳빳하게 말린 빨래 향이 그 어떤 향기보다 좋게 느껴진다.
취향에 관한 이야기를 적는 동안 그 어떤 글을 쓸 때보다 마음이 가볍고 흥겨웠다. 함께 글을 적는 작가님이 '글과 소개팅을 하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는데, 정말이지 글과 소개팅을 하며 내 근사한 취향들에 대해 한껏 자랑하는 기분이었다. 나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절로 콧구멍이 벌름대어지는 일이다. 새로이 누군가와 대화할 기회가 생긴다면 꼭 취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리라 다짐해본다.
'우리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