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모르고 살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날이 언젠지. 그녀에 관해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가족 중 누구도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에 나는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20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알게 됐다. 엄마가 여름날에 하늘여행을 떠났단 걸. 기일에 무얼 해야하는지 몰랐던 나는 그때부터 매 기일마다 엄마에게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마음껏 엄마를 생각하며 하고팠던 말을 할 수 있는 건 좋았지만 그 편지를 쓰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말이 좋아 엄마에게 쓰는 편지지, 그것이 엄마를 잃은 슬픔이 잔뜩 베인 자위용 쓰기 의식일 뿐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편지를 쓰는 나는 늘 울고 있었고 그래서 기일은 어쩔 수 없이 매번 슬픈 날이었다.
내가 23살이 되던 해, 그러니까 엄마의 15번째 기일은 여느 때와 조금 달랐다. 나는 그때 당시 사귀고 있었던 전남친(현남편)의 손에 이끌려 아무 계획없이 기차에 올랐다. 발길이 이끄는 대로 달려 도착한 곳은 전주였다. 늦은 저녁 어느 한옥카페에 앉아 그날도 어김없이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 그때가 처음이었다. 태어나서 여행이라는 걸 해본 것도, 엄마의 기일에 울지 않은 날도.
뜻밖에 여행 덕에 눈물 젖은 편지를 쓰지 않았던 그날,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엄마 기일엔 슬픔에 빠져있는 대신 엄마와 함께 여행을 해야하겠다고. 나는 38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엄마를 대신해 그녀의 기일마다 내 눈에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 엄마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덕분에 기일은 '엄마를 대신하여 그녀와 함께 여행하는 날'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다양한 곳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나의 고향 경주, 살고 있는 부산, 멀고 낯선 강원도, 왠지 익숙한 제주. 매해 기일에 맞춰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엄마를 실컷 그리다 돌아왔다. 엄마에게 편지를 적고 있으면 마치 그녀와 대화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때는 삶의 고민을 털어놨고, 여느 때는 그리움을 토해냈지만 여행 중인 나는 더이상 슬프지 않았다.
결혼을 한 이후론 남편과 함께 산소를 찾아갔다. 산소라기엔 작은 봉분하나 없는, 그저 엄마의 유해가 뿌려진 풀밭에 불과했지만 그곳에 가면 엄마가 있는 곳에 온듯 마음에 편안해졌다. 나는 더이상 혼자가 아니니 걱정말라 안심을 시키기도, 가끔씩 아빠를 끌고가 인사를 시키기도(?) 했다. 덕분에 기일은 '엄마가 세상을 떠난 슬픈 날'에서 '세상이 엄마를 기억하는 좋은 날'로 바뀌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엄마의 기일이 다가왔다. 한달 전부터 이번 기일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번엔 엄마에게 갈 수도, 엄마와 함께 여행을 떠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종일 침대에 이불을 뒤짚어쓰고 시무룩히 누워있던 나는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자리를 털고 집을 나섰다. 종일 나와의 접선을 기다리고 있을 엄마가 생각나서였다.
아쉬운 대로 조용한 카페에 앉아 15년 간 써온 편지들을 꺼내어 읽었다. 뭔 놈의 편지가 그리도 구구절절 아련한지, 내가 엄마라면 이 편지들을 받을 때마다 무척 마음이 아팠겠구나 싶었다. 평소에도 하늘에서 나를 지켜보며 적잖이 속상해할텐데.. 기일에 만이라도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크게 한번 숨을 내어쉬고서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 Dear. 사랑하는 당신, 강여사님께 > 로 시작한 편지는 -잘 커버린 딸 올림- 으로 끝났다. 편지를 적는 내내 나의 입꼬리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만약 엄마가 있었다면 '강여사 강여사' 거리며 잔뜩 까불었을 내가 떠올라서였다. 나는 마치 엄마가 곁에 있는 듯 촐싹대며 똥꼬발랄한 편지를 마무리 했다.
언제까지나 슬프고 애잔하게 엄마를 그리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도 엄마가 기뻐할 일도 아닐테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슬픔은 덜어지고 그리움은 커지는 듯 하다. 또 이 기일이 거듭될 수록 나 또한 단단해져 가고있다. 모든 날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순 없겠지만 적어도 이날 만은 꼭 행복하게 보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