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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함께 살고 있다

지금부터 써나가려는 글은 지난 한 달간 내가 마주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달간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 혹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의 죽음을 스쳐지나 보내며 하루 걸러 하루 죽음에 관해 생각했다. 지금껏 길지 않은 생을 살면서 여러 번 죽음을 맞이했다. 8살에는 엄마를, 20살에 할아버지를, 25살에는 할머니를 보내면서 3번의 가족 장례를 치르고 그 과정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고등학교 시절 사고로 친구를 잃기도 했고, 20대 가까운 이의 부모님을 보내드리기도 했다. 여러 번의 장례식을 오가며 배운 것은 '좋은 일에는 참석하지 못하더라도 힘든 일에는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번의 죽음은 내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었고, 그 이후로 나는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아가면서 좀 더 깊이 삶을 바라보게 됐다. 지금 내가 죽음에 관한 글을 쓰려는 까닭은 죽음과 함께 살아보고자 함이다.  



함께 근무 중인 동료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암 판정을 받은 지 고작 보름이 되셨다고 했다. 노모를 집에 모시고 삼시세끼 끼니를 챙기며 항암치료를 시작할 병원을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미처 몸과 마음에 고단함을 느낄 새도 없이 어머님이 떠나셨단다. 그토록 황급히 삶에 이별을 고한 것이 자신의 병에 대한 충격에서인지 당신 딸을 고생시킬까 하는 걱정에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평생토록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해드린 것이 없는 나이 든 딸은 예고도 없이 황망히 떠나버린 엄마를 원망했다. 3일간의 장례와 이틀 간의 제사를 내고 돌아온 동료 선생님은 부쩍 수척해지고 말수가 줄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은 무엇으로도 쉬이 위로할 수 없단 걸 알기에, 나는 매일 아침 가만히 따뜻한 차 한잔을 건네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다.

 


얼마 뒤 지인의 부고를 받았다. 10여 년 간의 투병생활을 이어가던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생전에 교류가 잦았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알고 지낸 지 꽤 오랜지라 연락을 받자마자 마음이 덜컥하고 내려앉았다. 얼마 전부터 몸상태가 악화되어 여러 번의 고비를 넘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때마다 그녀의 쾌유를 위해 기도해 왔던 터였다.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을 때마다 몸이 나아지면 얼굴 보고 이야기 나누자 약속했었는데,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그녀가 떠났다.


30대 후반. 생을 마감하기에 너무나도 젊은 나이였다. 20대부터 오랜 시간 투병만 하다 세상을 떠난 그녀의 삶이 가여웠고, 그녀를 보내고 혼자 남겨진 그녀의 남편이 걱정됐다. 장례식이 끝나갈 무렵 그녀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내었다. 부디 그곳에서는 고통 없이 편히 쉬라고, 멀지 않은 날에 하늘나라에서 만나 그간 나누지 못한 이야기 나누자고. 답은 오지 않겠지만 내 마음은 그녀에게 닿았으리라 믿는다.



반년 째 상담을 이어오고 있는 학생이 아침부터 죽고 싶다며 나를 찾아왔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앞으로의 생을 살아야 할 이유도, 살아갈 자신도 없다고 했다. 가출도 해보고, 술 담배도 해보고,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들을 두들겨 패 보기도 했지만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며 한 시간 내내 나를 붙잡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붙잡은 팔목에는 한 군데도 성한 곳 없이 칼로 그은 상처가 가득했고, 불과 며칠 전 한 움큼의 약을 털어 넣고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간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지금 당장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해도 놀라울 것이 없는 아이에게 '반드시 살아야 한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니 제발 살아달라'고 부탁해보았지만 초점을 잃은 아이의 눈은 힘없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정신과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기로 한 날, 아이가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다. 엷게 웃으며 그간 고마웠노라 작별을 고하는 아이를 보내고 돌아와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그를 살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 무력감을 느꼈다.



엄마의 기일그간 혼자서 엄마에게 써왔던 편지 뭉치를 들고 조용한 카페를 찾았다. 20살이 되어서야 알게 된 엄마의 기일, 처음으로 적었던 편지에는 엄마를 지키지 못한 미안함과 상실에 대한 슬픔이 가득했다. 엄마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20살의 나는 엄마를 그리며 한없이 아파고, 나를 두고 간 엄마를 원망하며 앞으로 다가올 엄마 없이 맞아야 할 날들을 두려워했다.


그로부터 1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매해 기일 편지 속의 나는 한 뼘씩 자라났다. 조금씩 엄마의 부재를 받아들였고, 삶이 주는 숙제들을 풀어가며 조금씩 단단해졌다. 엄마의 25번째 기일, 33살이 된 나는 담담히 이 세상에 낳아준 것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에 대한 기대를 편지에 담았다. 더불어 지금껏 내 모든 삶의 순간을 함께 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편지를 마무리 짓고 정신을 차리자 귀에 꼽고 있던 이어폰에서 한 줄기 가사가 흘러나왔다. 무언가에 홀린 듯 천천히 노래의 제목과 가사를 확인한 나는 엄마가 지금도 내 곁에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 괜찮다, 모두 괜찮아질 거다, 우리 다시 나자' 엄마는 오래 전 이세상을 떠났지만 단 한번도 내곁을 떠난 적이 없다.


남편이 지난 반년 간 준비했던 시험에서 떨어졌다. 함께 고시생활을 하며 곁에서 그 과정을 지켜봐 온지라 결과를 확인한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히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참을 울다 정신을 차린 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짐짓 모른 척 결과를 확인해보라 했다. 얼마 뒤 결과를 확인한 남편은 잠시 혼자있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퇴근 후 남편을 만나기 전 마음을 가다듬었다. 너무 슬퍼하지도 애써 억지웃음을 강요하지도 말고, 그저 가만히 남편의 곁에 머물러주며 위로해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슬픔과 분노, 좌절감으로 범벅된 남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가슴이 먹먹히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남편은 조금 살만해지나 싶었더니 또다시 시련이 시작되었다고, 역시 '생은 고(苦)'라며 사라지고 싶다고 했다.


결혼을 하자마자 겪은 사고, 그 이후 보낸 2년 여의 시간 동안 우리는 둘만의 시공간 에서 우울감과 무력감에 잠식되어 살았다. 앞으로의 삶에서 어마어마하게 기대되는 것도, 죽기 전에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꿈도, 책임져야 할 자식도 없는 우리 부부에게 죽음이란 언제 찾아와도 무방한 것이라 여겨졌다.


사라지고 싶다면 사라져도 된다고, 그러나 당신이 사라지면 나 또한 살아갈 이유가 없기에 함께 갈 거라고. 다만 지금까지 30년을 고생만 하고 살아온 것이 억울해서 이렇게 그냥은 못 간다고, 갈 때 가더라도 마통으로 대출 몇천 땡겨서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가자 했더니 남편이 눈물을 그렁대다가 피식하고 웃었다. 그날 밤 서로를  끌어안고 말없이 등을 다독였던 우리는 그 후로 삶과 죽음 그 사이를 오가며 생을 살아내고 있다.         



사고 이후 나는 죽음을 더 이상 먼 곳에 있는 낯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든 찾아올 수 있고 나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며 언제든 죽음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산다. 비 오는 날 출근길에 남편과 작별인사를 하며 이것이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잠결에 깨어나 가만히 잠든 내 고양이와 남편을 내려다보며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들의 상실에 대해 상상하기도 한다.


생을 살아가는 동안 사는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아니, 죽음은 우리 곁에서 조금 떨어진 가까운 곳에 항상 함께 하고 있다. 언제 이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할지 모르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뿐이다. 오늘도 생과 사 가운데서 '지금  순간, 내 눈 앞의 사람'에게 최선 다하기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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