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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봄이었다

코로나, 죽음과 가난, 전세 난민 그 사이 어디즘.

오래도록 기다린 봄이었다. 사고로 터키에 머물한번, 코로나가 시작되어 한번, 고시생 신분으로 한 번. 그렇게 장장 3년을 유예하면서 간절히 기다려온 봄이었다. 그러나 이제 곧 봄이 올 거라며 부풀었던 기대와는 달리 기나긴 겨울 끝에 맞이한 봄은 잔인하리만큼 차가웠다.


하루 몇 십만 명이 확진되던 그즈음 우리 부부도 코로나에 걸렸다. 기침을 해대느라 목 디스크가 다시 재발할 정도로 호되게 앓았다. 불티나게 바쁜 학기 초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기도 했지만, 가장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아픈 환자 둘이 나란히 집안에 갇혀있는 상황이었다. 마치 3년 전 만신창이가 되어 세상과 동떨어 진 채 둘만의 세상에 남겨졌던 그때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남편 시험이 코앞이라 더욱 불안했다. 확진자도 응시할 수 있었기에 많이 아프지 않기만을 바랬건만, 당연히 응시하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결국 시험을 치러가지 못했다. 시험 전날 오후가 되어서야 편도 4시간 떨어진 지역으로 오라는 어이없는 통보에 시험을 포기했다. 허무하게 놓쳐버린 기회에 남편은 망연자실했고, 나는 내게 코로나를 옮긴 이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며칠간 밤잠을 설쳤다.


누군가의 단순한 무지와 이기심 혹은 손해보지 않으려는 욕심이 한 사람의 노력과 절박함은 물론 한 가정의 미래를 처참하게 망가뜨려놓았다는 사실이 원통했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었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 사람의 탓을 할 수도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나는 화살을 내게로 돌렸고 또다시 남편의 삶을 망쳐놓았다는 죄책감을 지울 수 없오랜 시간 자책하며 나를 괴롭혔다.

  



지난해 1년 간 준비했던 시험에서 고배를 마신 남편은 올해 초 다시 공부를 시작한 터였다. 좌절감과 속상함을 애써 씹어 삼켰지만 실패를 받아들이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남편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앞에 시험날짜가 다가올수록 버거워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5kg 넘게 체중이 줄었고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느라 나날이 얼굴이 초췌해져 갔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불안감이 마음을 흔드는 듯했고,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내 마음에도 그늘이 졌다. 수척한 얼굴로 '이번에도 떨어지면 마음이 크게 무너질 것 같다'하는 그의 말에, '떨어지면 우리 함께 삶을 내려놓자'고 답했다. 우린 가진 것이 없었기에 잃을 것이 없었고, 그래서 마땅히 책임져야 할 것도 없었다.


남편이 일을 안 하는 것도, 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무 상관없었다. 그러나 남편이 위축되고 망가져 가는 모습을 더 이상 마주 할 자신이 없었다. 밝고 당당하고 건강했던 사람이 자꾸만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모든 것에 예민해지고 부정적으로 변해 가는 것이 속상했다. 내가 사랑했던 그의 모습을 잃고 내가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날 '삶을 함께 내려놓자'는 말은 단순하고 담담하게 꺼낸 얘기였지만, 분명 함께 보낸 힘든 지난 시간 동안 여러 번 우리 마음을 드나들었던 진심 어린 생각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부고 한통이 날아왔다. 남편과 같은 시험을 준비하던 한참 어린 동생의 소식이었다. 이틀 전만 해도 얼굴 마주하던 아이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다니. 믿고 싶지도, 차마 믿을 수 조차도 없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마주하고서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얼굴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코로나로 장례식장이 가득 차 빈소를 마련할 수 없다고 했다. 식장 대신 그 친구의 집을 찾아 그의 삶을 나누었다. 행복할 겨를 없이 힘들기만 하다 떠나버린 그의 삶이, 세상을 떠나기엔 너무 짧은 그 삶이 가엽게 느껴졌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 늦은 오후가 될 때까지 자신의 생을 두고 혼자서 수도 없이 망설이고 고민했을 모습이 그려져 마음이 짓이겨지는 듯 괴로웠다. 


남편은 그 친구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했다. 23살 한창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을 나이에, 그 어느 것 하나 맘껏 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삶이 주는 좌절 만을 감내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거라 했다. 자신은 10년 전 23살에 나를 만나 살아남았지만 그는 곁에 아무도 없어 그리 떠났다며, 마치 20대의 자신이 죽은 것 같다고 했다.


다시 찾은 화장터, 여러 노인들의 영정 사이에 놓인 그의 사진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간 삶을 감당하느라 참으로 고생 많았다고, 우리가 너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보겠노라 약속했다. 영정 속 그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 친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삶을 스스로 내려놓는 것이 남겨진 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아픔이 될 수 있는지,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한 것인지 그는 그 모든 것을 그의 생을 바쳐 우리에게 알려주고 갔다. 그날 밤, 남편은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살고 있는 전셋집에서 머지않아 나가게 되었다. 삶의 터전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진 남편은 서둘러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부동산 어플을 켜고 시세를 찾아보며 주말마다 모델하우스들을 둘러보다 보니 3년 전 첫 신혼집을 구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감히 꿈도 꾸지 못할 금액의 집값과 터무니없이 부족한 우리의 예산을 번갈아보며 막막해하던 그때와 비교해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모아놓은 목돈도 마땅히 손을 벌릴 곳도 없었던 우리에겐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우리를 힘들게 했던 좌절감과 패배감 만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누군가는 부모의 도움을 기반 삼아 집을 샀고, 누군가는 영혼까지 끌어다 집을 샀다고 했다. 그 집은 훗날 무럭무럭 자라 그들의 재산을 불려주었지만, 부모의 도움도 끌어다 쓸 영혼도 없던 우리는 여전히 빈손을 바라보며 막막함과 억울함, 서러움이라는 감정 속에 허우적 대고만 있었다.


넓은 평수에 좋은 브랜드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보고 돌아온 날 늦은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5시, 밤새 뒤척이다 일어난 우리는 마주 앉아 얘기하다 같이 울었다. 나는 '매번 진정으로 좋진 않으면서도 이만하면 좋다고 자위하고 사는 것이 속상하다' 했다. 그러나 남편은 '남들처럼 그럴듯한 집에서 살고 싶은 것이 지금의 우리에겐 욕심임을 받아들이자'고 했다. 지난 며칠 우리를 괴롭힌 것은 욕심에서 비롯된 감정들이었다.



살고 있는 도시 인근 소도시에 신혼부부들을 위한 공공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세워지고 있는 신도시, 으리으리한 브랜드 아파트들 틈바귀에 낀 공공아파트에 살긴 싫었지만 지금 우리에게 그것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었다. 담담한 마음으로 청약에 지원했고 결과 발표가 나기 전 날 우리는 잠에 들지 못했다.


당첨 소식을 확인 한 날, 우리는 한참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때 우리 마음에 찾아온 것은 기쁨에 찬 환희가 아닌 먹먹한 안도감에 가까웠다. 이제 더는 어디로 가야 하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정말 이 생을 계속 살아야만 하나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지난 3년 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신혼여행에서 겪은 끔찍한 사고와 버거웠던 환자 생활, 쉽지 않았던 백수 고시생 부부의 삶이 떠올랐다. 그리고 3년 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이 기나긴 고통이 곧 끝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 같은 것이 희미하게 머리를 스쳤다.  

  

끔찍하게 길었던 겨울이 갔고 참으로 잔인했던 봄을 지나고 있다.  조금 더 기다리다 보면 어쩌면 뜨거운 여름이 올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버겁지만 이 생을 좀 더 버텨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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