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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영잉 Sep 12. 2021

러시아부터 시작된 110일 배낭여행, 그 프롤로그

짠내 나지만은 않은, 사람 사랑 일기 그 첫 장

휴학 후 8개월 간 온갖 아르바이트를 섭렵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알바를 나열해보자면,

1. 짝퉁가방 판매 알바: 석가탄신일 조계사 앞에서 봉고차 전체에 가득 들어있던 가방을 완판하며 사장님께 두둑한 보너스를 받았다.

2. 과외 알선 아웃바운딩 알바: 랜덤 번호를 추출해 스팸성 전화를 돌리는 것을 '아웃바운딩'이란 고급진 단어로 칭함. 영업 성과가 꽤 나온다는 점이 신기했다.

3. 자취방 바로 앞 와인바 서버: 점잖게 와인으로 시작해서 소주로 만취되어 나가는 손님들을 보곤 했다.

4. 중고등학생 3주 캠프 과외 알바: 3주 동안 하루 8시간 씩 수학 과외을 했다. 내가 이렇게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를 갔겠다 생각했다. 힘들었지만 매 방학마다 참여한 마성의 알바.

5. 드라마 엑스트라 알바: 배우 지성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하며 마이크를 들이미는 극성 기자 역할과 지나가는 간호사 역할 등을 연기했다.


나중에는 아르바이트 이력서가 두 페이지를 넘어가, 웬만한 알바는 프리패스로 합격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대학 동기들은 고액 과외 몇 개만 뛰면 금방 돈을 모을 텐데 왜 사서 고생을 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원체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을 좋아할 뿐더러, 8개월 뒤에 한국을 떠날 계획이었기에 과외 학생을 책임질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사실 무엇보다, 8개월 뒤에 있을 고난과 역경을 대비하기 위해 각오를 다지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렇게 8개월 동안 모든 돈은 여행 경비로 썼습니다!' 하는 서사라면 이 여행기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주머니가 가벼워야 더 많이 만나고 경험할 수 있으리라, 부족함으로 더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간 모은 돈은 비상금으로 넣어두되, 최소한의 경비만으로 여행했다. 4개월 남짓한 나홀로 배낭여행은 그렇게 내 인생 최고의 경험이자, 추억이 꾹꾹 눌어담긴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나의 여행은 맛집 탐방이나 관광지 투어가 목적이 아니었기에, 외식하거나 좋은 숙소에 머물기보단 현지 가정에서 머물며 함께 식사했고, 비행기를 타기보단 시베리아 횡단 열차 또는 야간 버스로 이동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만난 북한 아저씨들과 무표정으로 무척 다정했던 러시아 아저씨들, 13개 도시에서 카우치서핑을 통해 만난 친구들과 가족들, 한인 민박에서 만난 소중한 식구들, 류블랴나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지금까지도 만나곤 하는 파비오 아저씨... 여행 중 만난 소중한 인연들은 때론 힘든 여행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주었고, 내 여행에 더 이상의 유희나 사치는 필요치 않았다. 


여행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남겼던 일기와 사진 속엔 그날의 기억, 그들과 나눴던 대화와 감정이 담겨져 있다. 이 글과 사진으로 다시 한번 그때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보려고 한다. 어느 땐 한껏 신이 나다가도 어느 땐 한껏 우울하기도 하며, 때로는 지루한 하루를 보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나는 충만했다. 부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때 그 시간 나와 함께 그 충만함을 느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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