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밍영잉 Jun 23. 2023

참을 수 없는 가족의 존재

가족 에세이 콘테스트 수상작


제목: 참을 수 없는 가족의 존재


진한 커피색 언니,

언니는 얼굴이 검다. 4년 차이로 한 배에서 나왔는데 나는 하얗고 언니는 검다. 우리는 mbti도 모든 글자가 다르다. 즉, 상극이다.


모든 동생들은 언니에게 당한 억울한 일화를 말하자면 날밤을 샐 수 있을 것이다. 생각 나는 어린 날의 일화를 말해보자면,


모든 소꿉놀이의 주인공은 항상 언니였다. 의사는 언니 나는 환자, 은행원은 언니 나는 고객, 훈련사는 언니 나는 개, 늘 이런 식이었다.


한 번은 집 건넌방에서 통장을 신규 개설하기 위한 고객 연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은행원이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방을 나갔다.


서류를 미리 작성해보기도 하고 바닥에 누워 기다리기도 했지만, 은행원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거실로 나가보니, 은행원은 엄마 옆에서 얌전히 티비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배신감이란 것을 느꼈지 않나 싶다.




머리가 크고 나서는 나름 쿵짝이 잘 맞아, 같은 대학을 다니던 때에 1년 정도 원룸에서 함께 자취를 하기도 했다.


가끔 억울한 어린 날의 일화를 풀어놓을 때면 언니는 빵빵 터지며 '내가 언제 그랬냐'라고 부인한다.


본인 덕분에 잘 자란 거라며 고마워하라고도 말한다.


나도 뭐 언니에게 꾸준히 맞고 자란 덕에 맷집이 좋고 겁이 없다는 점이 썩 마음에 든다.


끝내주게 논리적인 언니와 대적하기 위해 애쓰다 보니 논리적인 사고가 길러진 것 같기도 하고...



우리는 서로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거의 매일 카톡을 하고 대화에는 늘 'ㅋ'이 열다섯 개 이상 난무한다.


어쩔 수 없는 내 언니인가 보다. 항상 궁금하고 웃기다.


입에 쓰지만 이미 그 맛에 중독되어 평생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커피처럼.


 


하얀색 엄마,


엄마는 식물을 좋아하신다. 우리 집 첫째는 언니가 아닌, 산세베리아라는 선인장도 아닌 기다란 식물이다.


무릎 정도 되는 작은 것이 지금은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아 천장에 닿을 기세다. 봄이면 꽃도 피고 새 다발도 나온다.


최근에는 천사의 나팔이라는 꽃화분을 새로 들여오셨는데, 처음엔 꽃 한 방울 피지 않더니 요즘 날이 따뜻해지니 꽃을 피워낸다.


엄마의 근황보다 그 친구의 근황을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엄마가 그 친구의 생장일기를 거진 매일 카톡으로 보내시기 때문이다.


그래도 생장 일기 뒤에는 내 안부를 물으신다. 다행이다.


 


오랜만에 휴가를 내고 한낮에 본가에 들렀다. 평일 낮에 집 주변 경치 좋은 커피집에서 몇 시간 동안 엄마와 배꼽을 잡으며 수다를 떨었다.


온갖 재미있는 일화들을 쏟아내기도 하고, 근래의 고민을 말하며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았다.


엄마는 딸과 수다 떨 때가 가장 재밌다고 하셨다.


나는 이곳저곳에서 늘 재밌는 일을 벌이며 살고 있는데, 엄마는 나와 있는 때 가장 재밌다고 하시니,


어쩐지 한 구석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얀 도화지에 두 딸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으니, 다른 그림을 채워 넣는 것이 그게 잘 안 되시나 보다.


오늘도 맛있는 고기를 샀으니 먹으러 오라고, 오이소박이를 맛있게 담갔으니 가져가라고 문자를 보내신다.



보라색 아빠,


아빠는 내 생일마다 세상의 모든 과일을 어깨에 짊어지고 오셨다. 밥 대신 과일로만 살 수 있는 딸을 위해 온갖 종류의 과일을 사 오신다.


이번엔 무슨 과일을 사 오실까 기대하며 퇴근하는 아빠를 기다리는 것이, 기억이 흐릿한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생일날의 이벤트이다.  


과일은 서프라이즈이지만 선물은 선택이다.


늘 그랬듯 원하는 선물이 있는지 물어보셨고, 나는 '귀걸이'라고 답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케이크와 세상의 모든 과일을 어깨에 지고 오신 생일날, 의기양양하게 꺼내놓으신 보석함을 열었다.


달랑거리는 '강아지'금귀걸이였다.


귀 두 개, 눈 두 개, 코 하나, 꼬리 끝에는 반짝이는 큐빅도 하나 박혀 있었다. 딱 초등학생 어린이들에게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었다.


 


딸내미 나이를 말하지 않은 아빠의 잘못인지, 묻지 않은 금은방 아저씨의 잘못인지 모르겠다.


금은방 아저씨가 추천해 준 것들 중에 내가 좋아하는 강아지가 달린 것으로 고르셨단다.


어렸을 때 결사 반대하시는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조르곤 했는데, 그 강아지가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나는 귀걸이를 교환하지 않았다. 그냥 강아지 귀걸이가 잘 어울리는 딸이 되기로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