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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영잉 Jun 29. 2023

네 식구의 프라하 스텝밀

느린 산책, 그리고 스탭밀에 대하여



첫 외출,

손님들에게 '발이 아파 민박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스태프'로 알려지면서, 몇몇 귀가한 손님들은 거실 테이블 앞에 앉아 무언가 하고 있는 내게, 바깥 날씨를 상세히 설명해주시곤 했다.


오늘도 역시 어느 손님의 실감 나는 바깥 풍경 묘사를 듣고 있는데, 오늘은 결코 참지 못하고 아픈 발이 눈치채지 못하게 얼른 잠옷 위로 외투를 걸쳤다.



나는 걸음이 빠르다.

아마 내 게으른 행동이 만들어낸 모순된 습관이 아닐까 싶다. 어딘가 항상 빠르게 가야만 했다.

서둘러야 했기에 빠르게 걷던 걸음은, 어느새 게으름 피울 수 있는 핑계가 되어 서두름과 게으름 사이를 수시로 오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오늘은 아픈 발을 어르고 달래며 여유롭고 성실한 걸음을 걸었다. 어찌 됐든 평소와는 다른 걸음을 걷는 사람이 된 것, 잠옷 차림으로 프라하 시내를 거닌다는 것이 참 재밌고 감사하다.   


느리게 걸으니 보이는 것들이 참 많다.

광장의 비눗방울이 큰 원형 고리에서 빠져나와 어린아이들을 한참 몰고 다니다가, 다른 커다란 비눗방울에 인기가 옮겨지면 비로소 바닥에 닿아 푝 하고 터지는 비눗방울의 생애라던가.

(혜수가 하루에 두 번 먹으라던) 굴뚝빵을 사는 사람들의 추가 토핑 선호도라던가.

*혜수는 대학교 1학년 시절 기숙사 룸메이트로 만난 친구이다.


대부분은 굴뚝빵 안에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한가득 담는 토핑을 선호한다. 먹는 방식도 거의 비슷하다.

굴뚝 위에 고깔 모양으로 돌려 얹어진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그리고 굴뚝 아래에서 배출되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목을 꺾어 호로록-.

이를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정작 굴뚝빵은 먹지 못하고 아이스크림을 가득 머금은 굴뚝빵은 그대로 버려진다.


나도 혜수의 말을 따라 굴뚝빵을 하나 주문했다.

아무 옵션도 추가하지 않은 굴뚝빵을 뜯어먹으며, 버려지고 있는 눅눅한 굴뚝빵들을 조용히 추모했다.



오전 일을 마친 후 식구들이 거실에 모였다.

나의 첫 요리로, 환상적인 마늘베이컨볶음밥을 선보이겠노라 어젯밤부터 호언장담했다.

그 어떤 메뉴보다 간단한 메뉴였지만, 지난번 러시아 나탈리 집에서 마늘 볶음밥을 처참히 실패했던 터라 이번엔 꼭 식구들에게 제대로 된 볶음밥을 해주고 싶었다.


결과는 대실패.

후추인 줄 알고 왕창 뿌린 솔티드 마늘 플레이크로 볶음밥은 염전이 됐고, 야심 차게 만든 오늘의 요리는 또 한 번 요단강을 건넜다.

홍비와 현우오빠가 맛있다며 열심히 먹어준 문제의 마늘볶음밥, 하지만 그들은 하루종일 물을 마셨다.

공교롭게도 이후로 나는 식사 당번이 된 적이 없다.

내가 이곳에 온 지 며칠 뒤, 요리천재 신재오빠가 스태프로 다시 합류하셨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신재오빠에 대하여

신재오빠는 세계를 여행하며 흑백 사진에 그곳의 빛과 공기, 사람과 시간을 담는 사진가이시다.

무릇 식구란 너무 가까운 존재라, 밖에서 어떤 멋진 일을 해내고 있는지보다는 '오늘 뭐 먹지?'를 더 많이 고민하는 사이이기에, 훗날 신재'작가님'의 작품들을 보았을 때 입이 떡 벌어졌다.

작가님의 섬세한 감각과 늘 절묘하게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던 습관이 사진에 모두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신재오빠는 심사장님의 친구이자 민박집의 원년 멤버로, 다른 나라에서 작업을 마치시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셨다.

사진뿐 아니라 요리에도 능하셔서 스텝밀의 9할을 담당하셨다. (1할은 홍비의 고정 메뉴 고구마 맛탕)


우리가 먹은 사랑스러운 스텝밀

스탭밀은 말 그대로 스태프들을 위해 제공되는 식사이다. 식재료는 심사장님에 의해 제공되지만, 재료를 최대한 활용하여 굉장한 요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 몫이다.

다만 문득 대단한 음식이 해 먹고 싶어 졌을 때는 전략적으로 식재료를 확보한다.


심사장님이 손님을 위한 아침 식재료 장보기를 부탁하시는 날에, 최대한 ‘부자연스럽게’ 우리가 원하는 식재료를 제안한다.

심사장님은 우리의 의도를 간파하시고 큭큭 웃으시며 ‘같이 사~’라고 말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전화기 밖으로 한껏 신난 액션을 취하곤 한다.


모든 상황을 스릴 있고 재미있게 만들어버리길 좋아하는 우리였다.


옹기종기 네 식구의 계란후라이
홍비의 스패셜 간식 고구마 맛탕
영화 한 편과 파스타
최적의 윤기를 가진 짜파게티
최적의 물의 양을 지킨 라면
햄 파스타
간식으론 체코 꿀케이크와 도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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