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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영잉 Jul 20. 2023

맛있는 냄새 가득한 프라하 4인 영화관

변덕스럽게 비 내리는 10월의 프라하를 좋아하는 이유


바람이 약간의 틈새 벌어진 창문을 흔드는 소리가 났을 때,

내 머릿속에는 아파트 7층 높이의 커다란 도깨비가 땅을 쿵쿵 울리며 걸어오는 장면이 떠올랐다.


악몽을 꿀 때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감각이 있다.

손을 꽉 쥐어보지만 손톱 끝이 손아귀에 닿지 않고, 굵은 쇠막대를 쥐고 있는 것처럼 결코 오므려지지 않는, 그 느낌은 마치 달지 않은 크림을 입에 한가득 머금은 듯한 느끼함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딱 한 가지 종류의 악몽을 꾸었다. 딱히 가위에 눌린 적은 없지만 그 큰 도깨비가 집 밖에서 고개를 숙여 우리 집 안을 확인할 때, 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면 동시에 손바닥 감각이 이상해지곤 했다. 기분 나쁜 느낌이다.


바람이 사그라들자 어느 틈에 도깨비는 머릿속에서 빠져나와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잠이 깼다.


어두운 침실에서 나와 거실로 나가는 문을 여니, 식구들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가 지난 꿈에 몸에 남은 스산한 느낌을 완전히 사라지게 했다.



나는 변덕스럽게 비 내리는 10월의 프라하를 좋아한다. 

건조한 가을 공기에 갈라지는 입술이 비 오는 날엔 조금 잠잠해지지만, 이것이 비 오는 프라하를 좋아할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비 내리는 날이면 식구들 모두가 거실 어두운 조명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잔잔한 하루를 보낸다.

빗소리와 잘 어울리는 차분한 어둠과 그 속에서 잘게 피어나는 웃음이 좋다.


오늘도 역시 비가 내린다.

손님 없는 거실에 군침 도는 냄새 가득한 프라하 4인 영화관이 열렸다.   

늦은 점심 메뉴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오일 파스타다. 특별할 것 없지만 바싹 튀긴 베이컨과 그 기름에 자글자글 구워진 마늘이 내는 향이 아주 만족스럽다.


당연히 요리 당번은 내가 아니고 신재오빠다. (마늘베이컨볶음밥을 염전으로 만든 이후 나는 요리당번이 된 적이 없다.)

신재오빠가 주방에서 멋지게 웍을 흔들며 요리를 하고 있으면, 우리는 거실에 빔 프로젝터를 설치한다.

주방을 몇 번 기웃거리다가 쫓겨나고, 우리끼리 거실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다 보면 신재오빠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온다.


'먹자 먹자 먹자-!'

(사진만 찍으려고 하면 익살스럽게 포즈를 취하는 분)


각자 파스타를 담은 그릇을 품에 앉고 의자 돌려 영화 리틀포레스트를 감상한다.

사실 조용한 감상은 아니고, 장면마다 한 마디씩 각자의 감상을 말하거나 배우의 대사를 성대모사한다.


'이야- 저거 맛있겠다'


비 내리는 날, 좋아하는 식구들과 좋아하는 파스타를 먹으며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것.

행복하다! 그러니 비 내리는 날 또한 좋아할 수밖에.



조용한 거실에 잘그락 잘그락 색연필 부딪히는 소리가 가득하다.

현우오빠의 본업은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오늘 같은 비 오는 날은 거실에 있는 널찍한 테이블에서 작업을 한다.

현우오빠의 그림은 한마디로 솜사탕 같다. 어느 도시의 분위기와 온도를 지붕의 색깔로 몽글하게 표현해 낸다, 건물 사이에 고개 내민 사람 또는 별들도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 지붕마다의 색은 현우 작가의 느낌에 의해 정해지는데, 그 과정에서 대여섯 개의 색연필이 잘그락  소리를 내며 지붕 위를 오가고 나면 마침내 하나의 색깔이 입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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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에는 심심한 먹깨비 두 명과, 신재오빠가 함께 앉아있다. 테이블 위에 가득한 도화지와 색연필은 현우오빠의 것만은 아니고, 홍비가 야심 차게 꺼내놓은 도구들이다.


우리는 각자 그리고 싶은 걸 그렸다.

서로의 얼굴을 그려주기도 하고 현우오빠의 그림을 따라 그리기도 했다. 아래 그림은 내가 한 붓그리기로 그린 식구들의 얼굴이다. 꽤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신재오빠가 그린 나, 아직까지도 이 그림이 마음에 드신다고 한다.



"우리 교회 다녀올게!"

비가 그친 일요일 아침, 신재오빠와 함께 저 멀리 까를교 건너의 동네에 있는 한인 교회를 가기로 했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치긴 했지만 젖은 돌바닥은 여전히 미끄러웠다.

강을 건너기 전,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 우리는 젤라또 가게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피스타치오 젤라또 하나, 초콜릿 젤라또 하나를 손에 꼭 쥐고 신이 난 걸음으로 다시 교회로 향했다.

우리의 최애 젤라또 가게, 엔젤라또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 같은 하늘색을 애써 무시한 채, 도전하듯 우산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우리에게 기어코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다.

조금만 더 가면 교회에 도착하는데!...


갑자기 마른하늘에 우박이 내리기 시작했다. 폭풍우 속에 커다란 우박이 바닥과 자동차에 퍽퍽 떨어졌다. 그 소리에 압도된 우리는 도저히 이것을 맞으며 전진할 수 없었다.

우리는 하늘이 가려진 곳으로 몸을 피했다. 번개가 떨어지고 돌바닥에 떨어진 우박은 마구 튀어 올랐다.

작가님과 나는 길을 걷다 우박을 피하는 이 상황이 퍽 재밌었다.


"그래도 피스타치오 젤라또를 다 먹은 후라 다행이야."


gif


우박이 자꾸만 수면을 흠집 낸다.

자꾸 바라보니 이것은 떨어지는 방울이 아니라 저 위에서부터 내려온 길고 뾰족한 장대가 계속해서 수면을 쑤시는 모양새였다. 흠집을 회복하기도 전에 마구 후벼대니 수면은 원래의 모양을 회복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오분이 채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그 흠집이 사라졌다. 폭풍처럼 내리던 우박이 이내 곧 잠잠해지고, 대신 볕이 구름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우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가던 길을 걸었다. 프라하 생활 한 달이면 이 변덕스러운 프라하 가을 날씨가 그저 재밌고 익숙해지는 것 같다.


무사히 교회에 도착하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교회를 나왔을 때는 비구름이 완벽히 게인 후였다.


이번 산책은 신재 오빠와 오래오래 기억할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우박 내리는 희한한 날, 둘이 함께 걸으며 나눴던 대회들이 전부 기억나진 않을지라도, 서로에게 집중하며 주변의 얘기가 아닌 서로의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꽤 의미 있는 기억으로 말이다.

오늘 비로소 프라하에서 만난 잠시 스쳐간 인연이 아닌, 정말 평생을 진득하게 함께할 좋은 친구가 생겼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리하여 프라하성 엽서 장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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