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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영잉 Oct 19. 2023

내년 여름, 라벤더 시럽을 함께 만들기로 했다.

브르노 부모님 댁에서의 하루와 우리의 마지막 밤

이보야가 우리를 부모님 댁으로 초대했다.

이보야의 동네는 브르노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동화 같은 풍경을 가진 곳이었다. 차를 타고 집으로 올라가는 길은 어린 시절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했던 카트라이더 게임의 굽이치는 길을 연상케 했다. 뒷자리에 앉은 나는 몸이 이리저리 기우는 통에도 창밖으로 지나치는 각양각색의 이웃집 마당을 구경하기 위해 시선은 줄곧 밖을 향해 있었다.


이 동네에 대한 재미있는 소문 (혹은 진실)

이웃 아저씨는 브르노 제일가는 억만장자인데, 그가 집을 지을 곳을 정할 때 체코 일대의 공기오염도를 직접 측정한 후 제일 공기가 좋은 곳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걸까? 밤공기가 더 상쾌한 것 같은 기분이다.


따뜻한 가족과 사랑스러운 집

그 길이 거의 끝날 즈음 집에 도착했다. 차고에 주차를 하고 집에 들어서니, 부모님께서 우리를 반가운 포옹으로 맞이해 주셨다. 웃음 만개한 인사를 나눈 후, 1층 현관에 그대로 짐을 놓아둔 채 거실로 이어진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혜성언니와 나는 거실로 들어가자마자 감탄사를 내뱉었다. 거실과 부엌은 부메랑처럼 구부러져 이어진 구조였다. 목재로 만들어진 주방 가구 위에는 여기저기  직접 만든 잼과 발효 시럽이 담긴 병들이 올라와 있었고, 부엌과 거실 사이에 놓인 긴 식탁은 아늑한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우와, 부엌이 너무 예뻐요!"


"하지만 부엌에서 요리를 할 때면 온 집안이 음식 냄새로 가득한 걸?"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거예요!"

현관에서는 거실뿐 아니라 부엌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양쪽에 있었기에, 1층은 거실과 부엌 그리고 현관이 도넛 모양으로 이어진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부엌문 앞에는 지하 창고로 내려가는 통로가 있었는데, 그곳은 아끼시는 와인, 수제 잼과 시럽을 담을 공병이 가득한 천연 와이너리였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운 집이 있을 수 있을까! 직사각형에 갇히지 않은 가구들이 자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머니께서 모든 것이 신기하고 궁금한 우리에게 홈메이드 라벤더 시럽을 탄 물과 하우스 알코올을 번갈아 따라주셨다.

홈메이드 라벤더 시럽이라니! 이보야는 여름이 되면 삼일동안 집에서 꼼짝 않고 라벤더 시럽을 만드는데 열중한다고 했다. 내년 여름에 다시 브르노에 놀러 와, 함께 시럽을 만들기로 약속했다.


함께 건배를 했다.

"나스뜨라비~"


2층으로 올라가 이보야의 방에서 재미난 물건들을 구경했다. 오래된 물건을 사랑하는 이보야는 어딘가 더운 나라에서 만들어진 오래된 작은 의자를 가져와 자랑했다. 소피 언니가 이보야 방에 놓아둔 예쁜 팔찌와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손톱 그라인더를 우리에게 선물하고 있던 터라 제대로 호응해주지는 못했으나, 굉장히 귀여운 의자였다.

이 이후에도 언니에게 줄곧 받곤 하는 손톱그라인더다.


브르노 뒷동산 밤 산책

이보야네 뒷동산으로 올라가 깜깜한 들판을 산책했다. 넘어지지 않으려 빛 한 점 없는 발 앞을  열심히 보며 걷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차라리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걷이 좋을 것 같다.

올려다본 풍경은 건물 하나 눈에 걸리는 것 없이 넓은 밤하늘과 별뿐이었다. 웬만한 별자리는 눈으로 식별이 가능했다. 언니들은 별똥별도 봤다지만 나는 거꾸로 걸으나 똑바로 걸으나 결국 끝까지 보지 못했다.




브르노 마지막, 좋았던 밤

프라하로 돌아가기 전, 브르노 시내의 소피 언니가 머무는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소피언니가 손수 만들어 준 떡볶이와 드라이드 토마토가 들어간 파스타는 한국에 들어와서도 종종 생각나는 감동적인 맛이었다. 브르노에서의 우리의 마지막 식사는 참 좋았다. 언니가 좋아하는 와인과 함께여서 더욱 좋았고, 우리 셋이 나눈 숨김없는 대화도, 좋은 글귀도, 아팠지만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준 오래된 얘기도 전부 좋았다.


언니들에게 오늘 우리의 하루를 색으로 표현하면 무슨 색일지 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언젠가 소피언니가 집 욕실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싶다던 그 타일의 색이 오늘 우리 하루의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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