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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영잉 Sep 08. 2023

 브르노 거리를 걷다 보면

모든 장면이 영화 같았던 체코 브르노 이야기

브르노에 도착했다.

언니들과 이보가 우체국에서 일을 보는 동안 잠시 혼자 거리를 산책했다. 이곳에 오랫동안 서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가로수는 그 우아한 덩치에 어울리는 넓은 나뭇잎을 뿜어내고 있었다. 내 두 손바닥을 펴 나란히 붙인 것의 두 배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거리에 듬성듬성 떨어진 커다란 낙엽을 꼭 한 걸음마다 밟기 위해 다리를 넓게 벌려 이리저리 발을 놓았다. 바삭-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제 막 아침 안개가 걷힐 만큼의 따뜻한 햇볕이 거리를 비췄고, 바닥에 깔린 초콜릿색 바짝 마른 낙엽이 빛을 받아 나른한 오후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프라하 거리와는 다른 브르노의 한적한 거리에서는, 오가는 사람이 적어 길을 지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내 앞에서 천천히 걷고 계시던 베레모를 쓰신 할머니가 가던 길을 멈추셨다. 나도 낙엽을 밟는 것을 멈추고 할머니의 시선을 따랐다.


벽에는 여러 포스터들이 붙어있는 게시판이 있었고, 할머니는 한참 동안 서서 그것들을 찬찬히 읽어보셨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 여행자는 그저 할머니 뒤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감각적인 색 조합의 포스터와 그 앞에 서 계신 할머니의 뒷모습이 마치 웨스 앤더슨 영화의 한 장면 같았기 때문이다.

산슬언니의 늠름한 걸음을 따라 브르노 시내를 활보했다. 언니는 프라하에서 가이드 일을 하고 있지만 브르노의 전문가이기도 했다. 브르노 시내에 들어서자 언니의 걸음은 습관적으로 우리를 이끌었고, 아는 것을 알려주지 않는 것을 못 하는 산슬언니의 본격적인 시내 투어가 시작됐다.


프라하 못지않게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 브르노였다. 언니의 말투는 또 얼마나 똑부러지고 상냥한 지, 왜 프라하 인기 가이드가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혜성언니와 나는 빠져드는 스토리텔링에 연신 '오~, 와~'를 반복하며 산슬언니의 뒤를 따랐다.


언니의 어깨에 걸쳐진 카메라 끝에는 체코판 둘리 '크르텍'이 귀엽게 매달려 있었는데, 언니의 경쾌하고도 씩씩한 발걸음을 따라 크르텍도 춤을 췄다.


우리가 향한 첫 번째 장소는 언니가 사랑하는 야외 카페였다. 

이 카페는 경제활동이 어려운 미혼모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좋은 취지를 가진 카페이자, 맛 좋은 와인과 커피와 함께 환상적인 마카롱을 맛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공원 한편에 빨간 컨테이너 박스가 마치 크리스마트 트리 앞에 놓인 빨간 선물 상자처럼 모여있었다. 혜성 언니와 나는 공원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우리의 대장, 산슬언니가 위풍당당하게 카운터 박스로 걸어가 주문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길쭉한 유럽 사람들의 평균키에 맞춰 뚫려있는 창구는 비록 대장님을 까치발 들게 만들었지만, 체코어로 야무지게 주문을 하는 모습에 우리는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주문을 받는 분께서 산슬언니와 잠시 대화를 하더니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무슨 일이지?'


이내 곧 대장님이 울상이 되어 테이블로 돌아왔다.

우리에게 맛 보여주고 싶었던 마카롱이 품절된 것이었다.


마카롱 대신 주문한 당근 케이크와 무스케이크, 그리고 커피와 와인으로 충만하게 감격하고 있는 혜성언니와 나와는 다르게, '그' 마카롱을 먹이지 못해 너무나도 아쉬워하던 산슬언니.

그 진심이 퍽 고마웠다.

"괜찮아요! 나중에 또 오면 되죠!"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공원 안에 있는 이 노상 카페는, 보드에 앉아 언덕을 내려오는 아이들과 뛰노는 강아지들을 눈으로 따라가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함께 하는 사람과 지금 함께 보는 풍경, 감상, 그리고 맛에 대한 열정적인 토론으로 느낄 수 있는 충만한 한낮의 행복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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