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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영잉 Oct 27. 2023

프라하 마지막 이야기

약속된 열흘을 훨씬 넘긴 어느 날, 다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말씀드렸던 열흘이 지나고도 또다시 열흘이 흘렀다.

낯선 도시 프라하에 처음 발을 딛었던 아주 비 오는 새벽. 족저근막염에 걸린 내 두 발은, 운동화 안으로 차오르다 못해 첨벙거리는 빗물과 함께 감각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문 닫은 가판대 처마 밑에서 한인 민박 사장님들에게 보냈던 십수 통의 메시지에는 '열흘’ 동안 스텝으로 일하게 해 달라는 부탁과 구구절절한 사연이 담겨있었다.

그때의 '열흘’은 대략적으로 계산된 최소 회복 기간이자 프라하에서의 머무를 최대 기간이었다. 발이 어느 정도 낫기만 하면 서둘러 새로운 곳으로 떠날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상 밖의 포근한 한인 민박 스텝 생활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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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떠나려고,

유난히 쌀쌀한 10월의 체코는, 이곳의 포근함에 듬뿍 취한 나를 더욱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마치 두꺼운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은 겨울 아침의 마음처럼.


식구들이 조금만 덜 좋은 사람들이었으면 좋았을 걸, 밤풍경이 조금만 덜 예뻤으면 좋았을 걸.

가고 싶은 곳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많았지만, 이 사람들과 오래 함께 할수록 더 오래 보고 싶어 져, 도저히 그 곧에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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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인사,

슬로베니아로 가는 야간버스를 타는 당일,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오렌지색 은은한 조명 아래 피자와 맥주 그리고 그리울 마늘 볶음밥이 식탁에 올랐다. 마지막 저녁 식사로 맛있는 바깥 음식을 먹자는 식구들의 제안을 거절한 후였다.

사서 고생하는 배낭여행을 하면서도 어떤 도시에서 나가는 날이면 유명한 식당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작은 사치를 부리곤 했는데, 오늘 만큼은 늘 함께 먹던 이 볶음밥이 먹고 싶었다.


출발하기 몇 시간 전 다 같이 모여 앉은 거실에 불이 꺼졌다.

눈물의 작별 인사를 노린 신재오빠의 전략은 대단히 적중했다.


잘 참을 수 있었는데.

홍비의 작별 인사부터 같이 눈물이 터지기 시작했다. 내 차례가 되고 한 명 한 명과의 기억을 되짚으며 말을 이어갈수록 목이 메고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흘러, 말을 끝까지 채 잇지 못했다.


신재 오빠는 구구절절한 인사 없이 코가 빨갛게 빛나는 못난 내 얼굴 그림을 건넸다.

아직까지도 내가 전화를 걸면 신재 작가님의 아이폰에는 이 얼굴이 뜬다. 루돌프도 아닌 이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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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식구들,

살면서 만나본 사람 중, 단연코 가장 사랑스러운 동생 홍비. 홍비는 정말 웃음이 많다. 재밌는 게 있으면 꼭 보여주려고 하는데 그게 무엇이든 무조건 웃게 된다. 왜냐하면 그걸 보여주며 되려 자지러지게 웃는 홍비의 모습이 더 재밌기 때문이다. 홍비는 감정이 얼굴에 다 떠오른다. 떨리면 떨리는 대로 민망하면 민망한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하지만 억지로 아닌 척 숨기지 않는 그 모습이 자연스러워 더 예쁘다.

무례한 듯 자상한, 다른 사람을 사진에 또는 그림에 담기를 좋아하시는 신재오빠. 믿고 듣는 looooop 플레이 리스트와 자연스러운 흑백사진 그리고 건강한 척추 3.4번을 선물해 주셨다. 나마스때.

그리고 남사스러워 말을 전하진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담아내시는 만큼 그도 사진기를 든 모습이 그러하다.

누군가 닮고 싶은 사람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주저 없이 강현우라고 말할 수 있다. 꾸밈없이 담백한 태도와 단단한 자신감, 여유로운 유머와 자연스러운 대화, 확신에 찬 겸손과 넉넉히 이타적인 마음. 강현우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그 어떤 사람이 풀어놓는 이야기보따리보다 강현우와의 시시콜콜한 대화가 훨씬 재미있음을.

  


잔잔한 추억과 소중한 사람들로 가득했던

프라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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