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스러움’의 결정판, 그 첫 번째 버전
박찬욱 감독이 17년간 마음속에 품어 왔다는 원작을 영화화한 것이기에 기대감을 가지고 보았다.
역시 박찬욱 감독 다운 영화였다. 훈장처럼 달려 있는 그에 대한 찬연한 수식어들이 총망라된 듯 한, 그래서 마치 ‘박찬욱스러움’의 결정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아내는 영화였다. 오랜 세월 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는 원작답게, 이 작품에는 세월 속에 숙성된 고민들이 촘촘히 배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떠올랐다. 팔순을 넘긴 하야오 감독이 관객들에게 마치 화두를 던지는 듯한 그 영화도 난해하기 그지없지만 보는 이들에 따라 많은 인사이트를 이끌어 내듯이 이번 박찬욱 감독의 영화도 그러하다. 영화 속에는 수많은 모티브와 상징들이 널려 있고, 중의적인 의미 부여가 넘쳐 나기에 관객은 그 안에서 각자의 시선으로 길을 찾게 된다. 다양한 해석이 분분하고, 논란도 있겠지만 정답은 없다.
박찬욱 감독은 이번에도 특정한 메시지를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 물론 그의 관점도 분명 있을 테지만 오히려 자신의 생각을 철저히 감추고 – 다양한 사유의 문을 열어둔 채 관객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그런 영화로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누구나 환갑을 넘긴 나이에는 한 번쯤 인생을 관통하는 세상살이에 대한 ‘회고’를 해봄직 하지 않은가? 모르긴 해도 아마 수년 안에 이와 같은 맥락의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더욱 원숙하게 만들어질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웨스트레이크의 원작 『The Ax』가 제시한 중산층의 몰락, 신자유주의적 인간 소외, 실업, 고용절벽, 자동화와 AI, 자본주의의 비도덕성, 가족 해체와 소통 단절 등 사회문제를 다크 하게 조명했다면 박찬욱 감독은 한국적 현실과 정서의 렌즈로 재해석하고, 특유의 블랙코미디 요소까지 가미하였다고 보인다. 결국 이 영화는 “단순한 리메이크”라기보다, “박찬욱적 성찰의 집약체”라고 보면 좋은 듯하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고 싶으신 분은 읽지 말아 주세요.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삶에 만족하던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 ‘만수’(이병헌). 아내 ‘미리’(손예진), 두 아이, 반려견들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만수는 회사로부터 돌연 해고 통보를 받는다. “미안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목이 잘려 나가는 듯한 충격에 괴로워하던 만수는, 가족을 위해 석 달 안에 반드시 재취업하겠다고 다짐한다. 그 다짐이 무색하게도, 그는 1년 넘게 마트에서 일하며 면접장을 전전하고, 급기야 어렵게 장만한 집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무작정 [문 제지]를 찾아가 필사적으로 이력서를 내밀지만, ‘선출’(박희순) 반장 앞에서 굴욕만 당한다. [문 제지]의 자리는 누구보다 자신이 제격이라고 확신한 만수는 모종의 결심을 한다. “나를 위한 자리가 없다면, 내가 만들어서라도 취업에 성공하겠다.” - 출처 : 네이버 영화
이 영화를 두고, 해피엔딩이니 배드엔딩이니 논란이 많다. 이미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인트로와 엔딩씬은 거의 흡사하다. 2층 전원주택의 뜰에서 온 가족이 행복하게 부둥켜안는 장면이다. 단순하게 내러티브만 따라가면 실직한 만수(이병헌 분)가 재취업에 성공하면서 예전의 행복했던 가정을 되찾는 결말로 보인다. 하지만 외형적으로는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각각의 캐릭터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더 망가져 있는 파국을 엿볼 수 있다.
만수는 새로운 직장에 이전처럼 아침 출근길을 재현하지만 그가 들어선 공장은 이미 무인화된, 사람이 필요 없는 직장일 뿐이다. – 사실상 만수 본인도 필요 없는 존재임을, 의미 없는 막대기 점검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함께 도둑질한 친구를 모함하라는 아빠의 권유를 거부하던 아들 시원은 마지막 장면에서 친구의 손을 뿌리친다. 관계마저 단절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일을 하느라 자신과 놀아주지 못한 남편에게 푸념을 늘어놓고, ‘열심히 살지 말 것’을 이야기하며 댄스와 테니스를 즐기던 아내 미리(손예진 분)는 이제부터는 ‘돈을 모으겠다’고 한다. – 내 관점에서 이것은 가치관의 퇴보라고 여겨진다. 바비큐 해줄까라고 제안하는 아빠의 말에 가족들은 돼지시체를 떠올리며 손사래를 치고, 따뜻한 가족 곁을 머물던 반려견 시투와 리투는 시체가 묻힌 사과나무를 미친 듯이 맴돈다. 살인까지 해가며 다시 얻은 행복이지만 헛된 것임을 반증하고 있다. 아무리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이것은 염세주의나 자조적인 관점이 아니라고 본다. 가장으로서 가족을 위해 애써온 노력은 가상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냥 덤덤히 이런 사회적 변화를 받아들이며 살아내는 게 인생이라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너무 지키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가 죽였던 인물들의 이름에서 그런 뉘앙스를 느낄 수 있다. 고시조(차승원 분)는 오랜 전통과 가치관, 구범모(이성민 분)는 모범적인 가장, 남편, 아빠 그리고 최선출(박희순 분)은 최선을 다하는 삶, 열심히 하는 것, 최고, 1등 이런 느낌이 들지 않는가? 나 만의 생각인가? ㅎㅎㅎ
영화 전반을 통해 느낀 점은 사운드의 설계다. 박찬욱의 미장센은 늘 완벽에 가까웠지만, 이번엔 시각보다 청각이 더 강렬했다. 고추잠자리가 풀볼륨으로 터져 나오는 첫 살인 장면, 공장의 굉음, 벌목기의 날 선 소리, 그리고 소음의 뒤를 잇는 적막 — 이 일련의 사운드들은 내면 불안의 파형처럼 관객의 감각을 흔든다.
알폰소 쿠아론의 『로마』가 남성성과 여성성을 소리의 교차로 표현했다면, 『어쩔수가없다』는 인간의 내면 불안을 기계음과 정적의 리듬으로 설계한 작품 같다. 소리의 과잉과 침묵의 절제가 공존하는 그 구조는
마치 한 편의 오디오 심리극을 보는 듯했다. 제목은 '어쩔수가없다'로 띄어쓰기가 되지 않은 채 표기되어 있다. 띄어쓰기는 문자언어를 위한 철칙이다. 음성언어는 띄어쓰기가 명확하지 않기에 그냥 띄어쓰기 없이 표기한 것이 아닐까?
이러한 논지의 근거는 오디오를 유독 강조하는 장면들에서 엿볼 수 있다. 소통과 단절을 소리로 표현했다고 보인다. 주인공 만수가 이어폰을 착용하는 장면은 외부와의 단절을 의미 한다. 수시로 아내와 영상통화를 하던 그는 언젠가부터 통화가 잘 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 미리의 귀를 클로즈업하는 장면, 나쁜 일까지도 함께 하겠다며 늘 조언을 해주던 그녀는 이제 이전의 그녀가 아니다. 통화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구범모 저택의 계단, 그는 소통이 안되어서 총에 맞아 죽는다. 풀볼륨 음악소리에 묻히는 언어는 우스꽝스러운 자막이 대신한다. 종이에 쓰여진 글자들(이름들)은 죽었다. 종이가 필요 없는 시대에 소리는 유일한 소통의 창구이자 단절의 트리거가 된다.
늘 단음(불완전소통)만을 들려주던 첼로 천재인 딸 리원만이 마지막 장면에서 전곡(완전소통)을 들려준다. 그림(문자가 아니다)으로 그려진 악보를 보면서 말이다. 다른 사람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던 단절의 아이콘처럼 보였던 리원이 마지막에 마치 예언과도 같은 말을 한다. "벌레가 들끓어서 나무가 죽어"라고 말이다.
많은 해석과 수많은 논쟁의 실마리는 박찬욱 감독이 흩뿌려 놓은 중의적인 모티브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음식으로 비유한다면 여러 가지 재료와 양념을 조물 조물 무쳐서 어떤 이미지의 음식을 연출하는 나물반찬이 아니라 다양한 재료들은 그냥 한 그릇에 담아 놓은 포케 샐러드 같다. 콩, 연어큐브, 상추, 옥수수, 후레이크, 요구르트 등 하나하나는 어떤 맛이고 어떤 느낌인지 알겠는데 이를 한데 섞어 놓은 이 음식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아헤헤함'이 있다.
첫 직장은 ‘태양제지’. 해고된 후 만수가 취업을 희망한 곳은 ‘문 제지’라는 회사이다. ‘태양(Sun)’에서 ‘문(Moon)’으로, 즉 빛에서 어둠으로의 전이이다. 인트로 장면에서 단란한 가족을 묘사한 후 등장하는 2층 전원주택 위 하늘은 낮의 파란빛에서 빠르게 까만 밤으로 변화한다. 영화의 내러티브를 함축적으로 묘사하는 것 같다. 가족들을 부둥켜안고 햇빛을 바라다보던 만수는 재취업을 위한 면접자리에서 계속 햇빛을 피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사과나무를 심다가 햇빛을 가려 주는 아들에게 고마움의 미소를 보낸다. ‘문 제지’라는 회사명은 또 한 번의 언어유희를 품는다. 선출(박희순 분)을 죽이려는 장면에서 공장굴뚝에 세로로 쓰인 회사명은 처음엔 그냥 '문 제' 두 글자만 보이다가,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문 제 지’로 온전히 드러난다. 주인공이 당면해야 하는 수많은 '문제'를 메타포어 하는 듯하다. 그곳에 다시 입사하다니 또 다른 '문제'들을 직면하는 셈이 아닌가....
뱀과 사과의 모티브 역시 영화 전반을 관통한다. 성경의 선악과, 인간의 죄의식과 유혹, 선택을 상징하는 것이다. 첫 장면에서 아빠가 구워 주는 장어를 아들은 ‘뱀 같다’고 말하며 먹지 않고, 구범모를 죽이러 간 만수는 뱀에 물린다. 독사에 물렸을 때의 응급처치법을 거꾸로 알고 있는 범모처 아라(염혜란 분)는 결국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인다. 배경이 되는 구종시 입구에는 사과산지 표지판이 있고, 범모 집 마당에는 사과나무가 심겨진다. 모든 게 ‘유혹과 죄의 흔적’을 상징하듯 배치되어 있다.
첫 살인 장면에서 배경음악으로 나왔던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구범모는 "실직자는 사랑도 못하냐"고 항변했고, 아내와 외간남자의 정사 장면을 보고 오열한다. 만수는 최선출을 죽이기 위해 쳐들었던 고추나무 화분을 얼떨결에 사 와서 자신의 온실에 둔다. 만수가 가상으로 만든 제지회사의 사명은 '레드페(이)퍼'다. 모두 남성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전형적인 남성화 사회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가장으로서, 관리자로서 지니는 남성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고 있다. 그 '남성성'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오히려 개선이 아닌 '개악(改惡)'을 만들고 있음을 성찰해야만 한다.
만수는 오로지 가족을 지키려는 가장으로 등장한다. ‘3개월 안에 재취업’을 목표로 고군분투한다. 심리치료도 받고, 굽실거리고, 마트에서 일도 하지만 결국엔 살인을 택한다. 그 결과 그는 다시 제지회사에 입사하고, 가족의 외형은 복원된다. 아내의 테니스, 딸의 첼로, 팔지 않아도 된 집,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부패한 재생(再生) 일뿐이다.
“실직이 문제가 아니라, 실직에 대처하는 태도가 문제야.” 구범모의 아내가 던진 이 말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문장이다. 박찬욱은 ‘문제’를 이렇게 유희하며, 그 위에 기괴한 웃음을 얹는다. 구범모(이성민 분)는 음악카페라도 해 보라는 아내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아서 죽는다. 만수는 그를 죽이기 싫었다. 겹겹이 낀 장갑을 벗는 과정은 그의 망설임과 거부감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구범모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고시조(차승원 분)는 너무 고분고분해서 죽는다. 제지 기술의 일인자인 그가 어울리지도 않는 구두점 직원으로 굽실대고 딸아이 친구들에게도 굽실대며 비굴하게 산다. 그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모습도 만수에게 있기 때문이다. 총을 쏠 때 눈을 가리며 쏘는 이유이다. 사지를 절단하지 않고, 철사로 엮어서 분재처럼 만들어 매장하는 것도 본인과의 동일시라고 볼 수 있다. 최선출(박희순 분)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자신과도 같은 그 '남성성'들을 죽이고 있다.
이 과정 속에서 만수에게 늘 따라붙는 고통이 있었다. 바로 '앓던 이'다. 마지막 타깃이었던 최선출을 죽이는 과정에서 그는 주방에 있던 마구잡이 쇠집게로 스스로 충치를 뽑아 낸다. 7년간 끊었던 술도 마시게 된다. 전환의 모티브이다. 옳은 것은 아니다. 정답이 될 수도 없다. 그냥... 했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어쩔수가없다』는 사회적 영화이면서 동시에 인간, 특히 남성의 심리적 자화상이다. 감독은 현실의 폭력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폭력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을 더 깊이 들여다본다. 도덕의 경계가 흐려지는 이 세계에 그는 여전히 미장센과 사운드, 상징과 아이러니로 질문을 던진다.
이 영화는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당신은 이런 변화의 시대에 과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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