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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디맨 Feb 14. 2019

사랑스러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영화 《ROMA》 에서 보여지는 남성상과 여성상

카메라 앵글은 넓적한 타일 바닥에 고정된 채 정적을 머금고 있다. 스크린에 흩뿌리워지는 크레딧을 바라보며 약간의 기대와 흥분이 일지만 화면은 한치의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는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관객의 뇌리에 침착될 무렵 타일 바닥에 물이 끼얹어진다.
바닥에 고인 물은 반영(反暎)을 드러낸다.
건물 옥상들 사이로 조그만 하늘이 보인다.
누군가 물청소를 하는 모양이다.

잠시 후 비누거품도 섞여 들어오며 작은 하늘을 어지럽힌다. 비행기 한 대가 유유히 지나가는 모습이 비춰지고 물청소는 더욱 활발해 진다.
어느덧 비누거품이 하늘을 다 가리운다.
인상적인 오프닝

인상적인 오프닝에 걸맞게 최근에 보았던 영화 중에서 내게 가장 깊은 감흥을 준 영화이다.


작년 말 개봉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로마(Roma)!

언론매체는 멕시코 출신인 감독이 어린 시절 경험했던 유모를 비롯한 주변 여성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은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1970년대 초 멕시코시티 내 '로마'라는 지역이며, 한 중산층 가족의 젊은 가정부인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 분)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알폰소 감독의 특기인 '롱 테이크' 기법과 흑백필름, 잔잔 분위기에 절제된 편집으로 자칫 지루할 수도 있었을텐데 - 솔직히 '그래비티'는 지겨워 죽는 줄 알았음ㅋㅋ - 의외로 무서운 흡입력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넷플릭스 메인 포스터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리보를 위하여'라는 자막이 나오는 것처럼 감독 자신을 키워 준 유모 - 리보는 그녀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 를 기리는 영화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에서 감독이 그려내는 남성상과 여성상의 대비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 여성감독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그 차이가 너무나 극명하였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적어 보도록 하겠다.




멕시코 원주민 가정부인 클레오의 바쁜 일상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오프닝에서 보여 주었던 바닥 물청소, 4명의 아이들의 어지러진 방을 치우기, 요리와 설거지, 빨래 등 분주하기만 한 일과가 이어진다.

가정부 클레오와 고용주의 가족들

 여자1 

클레오는 부지런하며 밝고 상냥한 아가씨이다. 아이들에게도 인기가 많고 주인집 어른들에게도 공손한 캐릭터로 묘사된다. 함께 일하는 동료 가정부인 아델라의 소개로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고 둘의 사랑이 깊어져 임신까지 하게 되지만 임신사실을 말하자 남자친구는 말도없이 그녀의 곁을 떠나가 버린다.  그 이후로부터 이어지는 그녀의 삶은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린다. 남자친구와의 재회와 구애, 그리고 또 한번의 실연, 고통스런 임신기간과 사산의 경험….


전 아기를 낳고 싶지 않았어요"

자신을 원치 않는 삶으로 끌어들인 자는 다름 아닌 '남자' 였다. 사산 후 엉망이 되어버린 몸으로 수영도 할 줄 모르면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그 일을 계기로 클레오는 가정 내에서 새로운 입지를 얻게 된다.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다. 다시금 빨래와 같은 일상의 노동이 주어지지만 옥상 계단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가벼웁다.

가정부의 일상은 바쁘기만 하다

 자2 

또 한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바로 주인집 사모님인 소피아다. 그녀는 백인 여성으로 생화학자이며, 남편인 안토니오는 의사이다. 영화 초반에서는 클레오에게 매우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흔히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에서 보여질 수 있는 자연스런 장면들이 대부분이다. 사실 그 이면에는 아이들 양육과 남편의 외도로 인한 스트레스가 작용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결국 바람난 남편은 집을 나가 버리고 급기야 생활비까지 끊어 버리게 된다. 남편의 사랑을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하던 모습은 어느덧 분노가 되고 슬픔으로 변해 간다.


엄마는 작은 차가 좋단다

남편의 대형 세단을 운전하다가 여기 저기 긁히고 부딪힌다. 남편의 세간살이가 빠져 나간 빈자리는 허전하기만 하다. 생활 속의 작은 것 하나 하나가 고통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녀의 삶에서 '남자'가 사라짐으로써 그녀는 클레오를 사랑으로 바라보게 된다. 다시금 용기를 되찾고 홀로 서는 삶을 감당해 낸다. 차도 남편이 쓰던 차가 아닌 작은 차로 바꿨다. 비로소 그녀의 얼굴에 사랑과 평화가 깃들기 시작다.

남편의 외도로 힘들어 하는 소피아

이 두 여자의 공통점은 남자로부터 상처를 받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녀들은 연대한다.


 남자1 

클레오의 남자 친구인 페르민은 용맹한 무사가 되고 싶어하며 클레오 앞에서 무예를 자랑하기도 한다. - 자신감의 상징인 나체는 왠지 추해 보인다. 하지만 클레오의 임신을 부담스러워 하며 함께 영화를 보던 중 자취를 감추고 만다.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훈련장을 찾아온 클레오를 겁박하며 또 한번 도망을 치는 페르민은 결국 폭도가 되어 버렸다. 정치적인 폭동 속에서 또 다시 우연히 마주친 클레오 앞에서 그는 총을 든 광기의 살인마나 진배없었고 역시나 또 다시 클레오를 외면하고 만다.


 남자2 

소피아의 남편 안토니오 역시 마찬가지다. 차안에서 담배를 아무렇게나 비벼 끄고, 좁은 앞마당에 주차하기에는 너무나 불편한 대형 세단을 몰고 다닌다. 캐나다 장기 출장이라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아이들을 속이고 바람을 피우며 연애하는 장면을 들키기 까지 할 정도로 허술하다. 결국 처자식을 내팽겨친 채 자신의 재산을 가져가 버리고 생활비도 주지 않는다. 우연히 병원에서 출산을 앞 둔 클레오를 만나지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할 뿐 바쁘다는 핑계로 적극적으로 도와 주지도 않고 자리를 피한다.


이 두 남자의 공통점은 책임을 회피한다는 점이다. 허세와 위선으로 가득차 있는 그들은 비겁하고 지극히 이기적이다.

산불, 분주함은 있으나 그 속에 효율성은 없다

이 영화에서 독특한 것은 카메라 액션이다. 줌인아웃 없이 고정된 포인트에서 주인공을 관조하듯이 매우 느린 피치 페닝(앵글의 수평 이동)만 반복한다. 마치 캐릭터의 삶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듯이 철저히 제 3자의 시각을 견지한다. 향은 절제되어 있다. 대사 뿐만 아니라 각종 효과음도 필요한 시점이 아니면 철저히 배제한 듯한 인상을 준다. 영화는 내내 이러한 스크린 기조를 유지하며 진행된다.


하지만 시종일관 끊임없이 불쑥 불쑥 등장하는 어떤 '소란'이 있다. 그것은 시끄럽고 짜증나는 소음처럼 청각적인 것도 있지만 역겹고 지저분하며 왠지 외면하고 싶은 시각적인 장면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어김없이 '남자'가 연관되어 있다.


영화에서 두 번 등장하는 군악대. 활기차고 절도있는 연주가 아니라 소음에 가깝게 연출된다. 첫 번째는 안토니오가 떠나 가는 장면이고, 두 번째는 안토니오의 세간살이가 빠져 나간 장면이다. 남자들이 모인 자리엔 너저분한 술병이 아기 우유병과 함께 놓여져 있고, 가족들과 피크닉을 가서 하는 남자들의 유희란 늪 저 편으로 시끄러운 총질을 해대는 것이다. 훈련장에 모인 젊은 청년들은 멋진 총검술을 선보이지만 정작 조교의 간단한 요가 동작을 따라할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다. 오직 구경꾼으로 서 있던 클레오만이 그 유연한 동작을 따라 할 수 있을 뿐이다. 소란하지만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하게 산불을 끄는 군상들, 서로를 치고 받는 폭동의 현장 속 청년들, 교통 체증 속에서 번잡스럽게 움직이는 운전자들, 돌을 던져가며 난폭하게 싸우거나 진흙탕 길을 첨벙거리는 사내아이들, 유세장에서 떠들어대는 후보자와 지지자들 그리고 시장과 영화관에서 떠들고 담배피는 지저분한 남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들을 구하러 바닷물에 뛰어드는 클레오

반면 여자들이 중심이 되어 등장하는 장면 고요하고 평화롭. 상에 나부는 빨래는 브래지어와 여자 속옷들로서 파란 하늘에 아름답게 비춰진다. 클레오와 친구 아델라와의 교제는 언제나 즐겁고 경쾌하다. 그녀들은 서로 협력하며 위로하고 의지한다. 신생아실의 간호사들은 지진이 나자 아기들을 보호하려 발버둥 치고, 할머니와 소피아의 친구 여의사는 양수가 터진 클레오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클레오와 소피아가 함께 한 여행에서는 힐링이 일어난다. 클레오는 물에 빠진 아이들을 위해 몸을 던지고 아이들은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든다. 여자 아이들이 섞여 있을 때 남자아이들의 노는 모습은 자못 달라진다. 총싸움 놀이가 아니라 드넓은 평원을 거니는 것이다. 고향에 찾아 간 클레오에게 어머니는 여유와 휴식을 제공해 준다.

바로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여자'의 모습이다.

고향에서 여유를 즐기는 클레오

이 영화의 주요 모티브로 등장하는 비행기가 흥미롭다.

오프닝 장면에서의 반영(反暎)과 훈련장에서 조교가 요가를 선보이는 장면, 그리고 엔딩에서 클레오가 옥상에 빨래를 널러 간 후에 나타나는 3대다.


비행기는 아주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사용되는 수단이다. 조용하고 유유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원대하고 험난한 여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마치 갇혀 있는 좁은 굴레에서 벗어나 담담하게 자신들만의 인생 여정을 항해하는 여성들을 은유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 아래 땅 위에는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쪼잔한 남성들이 우거하고 있을 터이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상징과 은유들이 영화 곳곳에 숨어 있어 한 두번의 감상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듯 하지만 의미심장하게 눈에 들어 온 장면이 하나 있다.


남편이 자신의 세간살이를 쉽게 가져 가도록 집을 비워둘 의도로 떠난 바닷가 여행에서 소피아가 아이들에게 모든 사실을 말하고 위로하는 장면이다. 아이들은 울거나 침통해 있고 이미 두 남자에게 각각 버림을 받은 클레오와 소피아는 서로를 부등켜 안고 있는데 뒤에서는 신혼부부가 파티를 즐기고 있어 아이러니 했다.


엔딩 씬에서 앞서 날아 간 2대의 비행기는 클레오와 소피아를, 그리고 한 참 후에 뒤따라 날아 간 비행기는 신혼을 맞이하는 어떤 여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을 응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하는 남자와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지만 결국은 홀로 유유히 고요와 평화를 향해 비상할 위대한 여성들!!


여성이 남성에 비해 휠씬 많은 - 아니 절대적으로 많이 - 사랑의 요소를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여성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cf. 다시 한 번 감상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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